안동김씨역사안동김씨 역사(씨족사)
안동김씨 역사(씨족사)

씨족사 

안동(安東)(())김씨(金氏)

고려 태조 때의 개국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신라 경순왕의 손자라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안동(安東)(())김씨(金氏)가 있어

본관이 같으면서 시조를 달리한다.
김선평(金宣平)은 후삼국시대에 고창군(古昌郡)(안동(安東)의 신라말 이름)의 성주(城主)였다.

후삼국시대는 후백제가 고려와 쟁패를 겨루고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의 호족들이 성주(城主)ㆍ장군(將軍)을 자칭하며 행세하고 있었다.
930(경순왕 4, 고려 태조 13)에 있었던 고창군(古昌郡)에서의 싸움은 수세에 있는

왕건의 고려를 후백제에 비해 우세한 위치에 서게 하는 결정적인 싸움이었다.

고창(古昌)싸움이후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을 포섭,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 고창(古昌)싸움에서 태조 왕건측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였던 김선평(金宣平)ㆍ권행(權幸)ㆍ장길(張吉)이었다.

이 공에 의해 김선평(金宣平)은 아부공신(亞父功臣), 권행(權幸)과 장길(張吉)은 공신(功臣)이 되고

세사람 모두 공신당벽상(功臣堂壁上)에 도화(圖畵)되었다.

왕건은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권행(權幸)ㆍ장길(張吉)을 대상(大相)의 위계에 올려주고 고창군(古昌郡)을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하였다.

김선평(金宣平)ㆍ권행(權幸)ㆍ장길(張吉)은 각각 안동김씨(安東金氏), 동권(安東權),

안동장씨(安東張氏)의 시조가 된다.

세 성씨는 이후 계속 안동(安東)의 대표적인 성씨로,

곧 안동의 지방세력의 향민(鄕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안동(安東)(())김씨(金氏)가 한반도의 대표적인 벌족으로 성장한 것은 조선 초기

10세 김계행(金係行)이 조정에 출사를 시발로 하여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등을 지내며

(後에 贈吏曹判書) 문호를 열고 유언(遺言)으로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吾家有淸白) 즉 내집에 보물은 없다.

다만 보물이 있다면 청백뿐이다 라는, 가훈(家訓) 시를 남기면서 학통(學統)을 종손(從孫)

김영(金瑛)이 잇고 그 아우 김번()의 증손(曾孫)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충신이고,

그 동생 김상헌(金尙憲)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충절로 뒤이어 많은

문무신과 학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순조조 이후는 이른바 안동김씨(安東金氏)세도정치를 한 시기였다.

11살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게 되고, 선왕(先王)인 정조의 고명(顧命)을 받은

김조순(金祖淳)이 국정을 총괄하게 되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 50여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시조 김선평(金宣平) 이하의 세계(世系)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공수부정(公須副正)을 지낸

김습돈(金習敦) 1세조(世祖)로 기세(起世)하고 있다.

안동(安東)(())김씨(金氏) 10세조 김계권(金係權)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분파(分派)되었는데, 그 후손에서 다시 김영전(金永銓)의 후손이 감찰공파(監察公派),

김영균(金永勻)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영추(金永錘)의 후손이 부사공파(副使公派),

김영수(金永銖)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로 세분되었다.

감찰공(監察公) 김영전(金永銓)의 후손 김홍(金弘)ㆍ김등(金登)ㆍ김응()의 후손에서

다시 분파(分派)되었는데, 이 이하는 생략한다.
10세조 김계행(金係行)의 후손은 정헌공파(定獻公派)로 분파(分派)되었는데,

그 후손에서 다시 김극인(金克仁)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극의(金克義)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극례(金克禮)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김극지(金克智)의 후손이 학생공파(學生公派),

김극신(金克信)의 후손이 군수공파(郡守公派)로 나누어졌다.
9세조 김삼익(金三益)의 후손은 어담공파(漁潭公派)로 나누어졌다.

김삼우(金三友)에게는 네 아들이 있는데, 김맹귀(金孟龜)의 후손이 계공랑공파(啓公郞公派),

김중귀(金仲龜)의 후손이 중파(仲派), 김숙귀(金叔龜)의 후손이 숙파(叔派)이고,

김계귀(金季龜)의 후손이 등암공파(藤菴公派)이다.
계공랑공파(啓公郞公派)는 다시 김시좌(金時佐)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시량(金時亮)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시우(金時佑)ㆍ김이려(金以礪)의 후손이 각각 생원공파(生員公派)로 나누어졌다.

등암공파(藤菴公派)는 김엄(金淹)의 후손이 습독공파(習讀公派), 김창()의 후손이

첨사공파(僉使公派),  김락(金洛)의 후손이 항재공파(恒齋公派), 김치림(金致林)의 후손이

목사공파(牧使公派)이다. 김언적(金彦迪)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준(金浚)의 후손이

국헌공파(菊軒公派), 김수정(金遂晶)의 후손이 학생공파(學生公派)이다.
6세조 김처상(金處商)의 후손은 호장공파(戶長公派)이다.

7세조 김지철(金之哲)의 후손이 다시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분파되었다.

김원수(金元水)의 후손은 사헌공파(司憲公派)이며,

5세조 김열(金烈)의 후손이 사과공파(司果公派)이다.
2세조인 김여중(金呂重)의 후손은 선군공파(選軍公派)인데, 4세손인 김용(金龍)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김학(金鶴)의 후손이 시중공파(侍中公派)로 나누어졌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인물로 조선조 중기 이전에 관직에 나아간 자로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김계행(金係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김치(金峙),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김영(金瑛),

승지(承旨)를 지낸 김중청(金中淸) 등이 있을 뿐으로, 명문벌족으로는 자리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동김씨(安東金氏)가문이 중앙무대에서 명문(名門)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조선조 중엽, 광해군 때 김극효(金克孝)

좌의정 정유길(鄭惟吉)(東萊鄭氏)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정유길(鄭惟吉)의 한 딸은 광해군(光海君)의 장인인 유백신(柳白新)(문화유씨(文化柳氏))

에게 시집가 김극효(金克孝)는 유백신(柳白新)과는 동서간이 된다.
조선조에 안김(安金) 15명의 정승, 35명의 판서, 6명의 대제학, 3명의 왕비를 내어

최고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때로는 당쟁의 와중에서 서인(西人)―노론(老論)에 속했던 안동김씨(安東金氏)

몇차례의 사화(士禍)에서 내쫓겨 김수항(金壽恒)ㆍ김창집(金昌集) 부자가 사약을 받는 등

영화와 비운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나란히 정승에 올랐다.

선원(仙源)은 선조 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 정언(正言), 수찬(修撰), 응교(應敎) 등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예조(禮曹)ㆍ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2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자 거듭 사임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족(王族)을 시종하고 강화(江華)로 피난하다가 다음해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글씨에 뛰어났고 시조(時調)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

그밖에 가곡원류(歌曲源流)등에 여러 편이 있다.
김상헌(金尙憲)은 대표적인 청백리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난에 청()과의 강화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가 6년간 유폐생활을 하기도 했던 충절(忠節)의 신하로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29년 정시문과(庭試文科), 광해군즉위(光海君卽位)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정언(正言),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예조(禮曹)ㆍ공조(工曹)ㆍ형조(刑曹)ㆍ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는데 다음해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出兵)을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다음해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1642년 의주(義州)에 돌아왔으나, ()나라와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갔던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을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고 고해바쳐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與) 등과 함께 다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

1645년 석방되어 귀국 후 좌의정(左議政),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등을 역임했다.

숭명파(崇明派)로 절의(節義)가 있어 당시 사림(士林)들의 신망을 받았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수항(金壽恒)ㆍ김창집(金昌集) 부자는 현종~숙종연간의 당쟁기간 중 모두 영의정(領議政)

까지 오르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당쟁으로 죽게 된 인물이다.
김수항(金壽恒)은 인조 24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1년 알성문과(謁聖文科),

16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 교리(校理)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659년승지(承旨)가 되었다.

다음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西人)으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남인(南人) 허목(許穆)ㆍ윤선도(尹善道)

3년설(年說)을 누르고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서인(西人)이 승리하게 했다.

1661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1672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다음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

()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효종비(孝宗妃)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김수흥(金壽興)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왕()의 부름으로 다시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남인(南人)에 대한 강경ㆍ온건파로 서인(西人)이 분열되자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에 소속되었는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김창집(金昌集)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산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정국이 바뀌자 복관(復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예조참판(禮曹參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호조(戶曹)

이조(吏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다음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ㆍ우의정(右議政),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1712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숙종 말년 세자(世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다가 소론(少論)에게 탄핵받았고,

숙종이 죽은 뒤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맡았다.

경종이즉위하자 노론(老論)의 대신(大臣)들과

합의, 왕세제(王世弟)(영조)의 책봉을 상소하여 이를시행케 했다.

1721(경종1) 다시 세제(世弟)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상소하여 시행케 했으나,

조태억(趙泰億) 등의 반대로 대리청정의 결정이 철회되자 치사(致仕)했다.

이어 소론(少論)의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老論)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 일대 옥사(獄事)(신임사화(申壬士禍))가 일어나자 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 다음해 사사(賜死)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관작이 복구되고, 후에 영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김이소(金履素)는 영조 40년 충량정시문과(忠良庭試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정조 16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이교(金履喬)는 정조 1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조판서(吏曹判書)ㆍ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공조(工曹)ㆍ형조(刑曹)ㆍ공조(工曹)ㆍ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1831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이때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이 모두 공석중이므로

한때 국정을 도맡아 책임졌다.
김조순(金祖淳)은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다. 정조의 고명(顧命)을 받아

순조 즉위 후 국정을 총괄했고 총융사(摠戎使),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순조 2년 딸이 순조비(純祖妃)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철종 대의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문장(文章)에 능하고 죽화(竹畵)를 잘 그렸다. 정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등장할 때까지 안동김씨가(安東金氏家)에서는 김조근(金祖根)

딸 헌종비(헌종비), 김문근(金汶根)의 딸 철종비(철종비)를 배출하면서 10촌안팎의 현제,

조카가 국정을 장악했으니 김조순(金祖淳)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을 비롯하여

김흥근(金興根),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김병시(金炳始)등이 돌아가며 영의정에 올랐다.
김조근(金祖根)은음보(蔭補)로 광주부판관(廣州府判官)을 거쳐 헌종 3년 일약 승지(承旨)에승진,

딸이 헌종(憲宗)의 비()로 책봉되자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다.

이어 어영대장(御營大將), 호위대장(扈衛大將), 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역임,

당시 새로 대두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과 함께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김문근(金汶根)은 헌종 7년 음보(蔭補)로 가감역(假監役)이 된 뒤 현감(縣監)을 지내고,

철종 2년 그의딸이 왕비(王妃)로 책봉되자,임금의 장인으로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다. 그후 금위대장(禁衛大將),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訓鍊大將) 등의 요직(要職)을 지냈으며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좌근(金左根)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중추적 인물로서 음보(蔭補)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이 되었다. 1839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84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우참찬(右參贊), 금위대장(禁衛大將),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52년 우의정(右議政)

지내고, 다음해부터 1863년까지 영의정(領議政)에 세 번 보직되어, 세도(勢道)를 누렸다.

1862년 이정청(釐整廳)이 설치되자,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1868년 삼군부(三軍府)

설치되자 영삼군부사(領三軍府使)가 되었다.
김흥근(金興根)은 철종 2년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864년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 때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고 다음해 영돈녕부사

(領敦寧府事)로서 치사(致仕)했다.
김병학(金炳學)은 철종 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후 고종 2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서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조두순

(趙斗淳) 등과 함께 산집소총재관(算輯所總裁官)이 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각각 완성했다. 보수파의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천주교(天主敎) 탄압을 적극 주장했고, 영의정(領議政)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의 체결을 극력 반대했다.
김병시(金炳始)는 철종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를 거쳐 관직에 나아갔다.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大院君)이재집정(再執政)했을때 지삼군부사(知三軍府使)가되었다.

1884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몰아내고 수구파 중심의 내각(內閣)을 조직,

외무아문독변(外務衙門督辨)이 되어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이탈리아ㆍ영국(英國)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다.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1894년의 동학혁명(東學革命)

청일양군(淸日兩軍)의 개입을 극력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뒤에 중추원(中樞院) 의장(議長)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과 왕세자(王世子)가 러시아 공관(公館)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親露派) 중심의 내각(內閣)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수구파로서 끝까지 개국(開國)을 반대했고, 1895년의 단발령(斷髮令)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반대했다.
김병연(金炳淵)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의 손자이다.

1811(순조 11) 평안도지방에서 홍경래 등이 중심이 된 농민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조부가 반란군에 항복하여 가문이 적몰되었다.

이에 굴욕을 느껴 벼슬을 단념하였으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방랑생활을 하였다.

풍자ㆍ해학으로 퇴폐해가는 세상을 개탄, 저주ㆍ조소하는 기발한 시구(詩句)를 가는 곳마다

쏟아놓으며 세월을 보냈다. 많은 한시가 구전되고 있다.
한말, 일제하의 인물로는 김옥균(金玉均)김좌진(金佐鎭)을 들 수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고종 9년 문과에 급제, 옥당승지(玉堂承旨)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일본에 건너가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

(朴泳孝), 부사 김만식(金晩植)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협력하여 독립당을 조직하고, 국정을 개혁하여

낡은 폐습을 타파, 곧 ‘개화’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지지를 배경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조직,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이 되었다.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만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

이와타(암전주작(岩田周作))라 변명하고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10년을 지냈다.

그후 청나라 세력으로 뜻을 이루어보려고 상해로 건너갔으나 1894년 3월 28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조정에서는 반역죄로 몰아 양화진에서 시체를 찢는 극형에 처하였으나,

이듬 해에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죄명을 벗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순종 때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을 받고 관리를 보내서 제사지내는 대우까지 받았다.
김좌진(金佐鎭)은 홍성에 사립호명교(私立湖明校)를 설립,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청년 학우회 회원, ‘한성일보(漢城日報)’이사로 있다가

31운동 때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었다.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1920 9월 청산리작전에서 이범석(李範奭), 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고,

1925 6월 호림(虎林)에서 다시 재기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925김혁(金赫)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총사령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 구국군사령관 양우일(楊宇一)과 함게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한ㆍ중연합군을 조직하였으나,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1930년 정신(鄭信), 민무(閔武), 이붕해(李鵬海) 등과 함게 한족(韓族) 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수석에 취임했으나 1930 1월 자객에 살해되었다.
1962 3 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 목      차 --------  

(1) 안동김씨  

(2) 문헌록  

(3) 씨족사 

(4) 안동김씨세보 

(5) 본관지 연혁 

(6) 오김의종통 

(7) 세계원류분파도 

(8) 先,後,안동김씨 

(9) 벌열 

(10) 조선조 급제자 정록 

(11) 등과,인명 

(12) 文化財및寶物 

(13) 서원향사(書院享祠) 

(14) 종묘배향 

(15) 선조문집 

(16) 유적 

(17)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18) 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