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역사안동김씨 역사(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
안동김씨 역사(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

안동김씨 가문의 성장과번영 (安東金氏 家門 成長 繁榮)

 

조선시대의 유수한 명가(名家)들 중에서 ()安東金氏만큼 다방면으로 얘기되는 가문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안동김씨 역시 하나의 작은 가문(家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동김씨가 조선후기 정치사상문화계에 남긴 족적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안동김씨 일문(一門)의 향배는 조선후기 왕조사의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었다.

흔히 ()안동김씨라고 하면, 명문<名門>벌열<閥閱>세도정권<勢道政權>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심한 경우에는 안동김씨를 권력독점과 부정부패에 따른 망국의 장본인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조선후기 300년에 걸친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희생과 문화학술계에 미친 공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마도 이는 19세기 세도정권에 따른 부정적 인식이 너무도 강하게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여느 성씨들과 마찬가지로 안동김씨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가문은 아니었다.

우선 안동김씨는 서로 시조를 달리하는 김선평(金宣平) 계열의 신() 안동김씨와

김방경(金方慶) 계열의 舊 안동김씨로 대별된다.

그리고 新 안동김씨 중에서도 가계와 거주지에 따라 가격(家格)이 서로 다른 무수한 계열이 존재하였다.

본고는 新 안동김씨의 다양한 갈래 중에서도 조선중기 이래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문벌가문의 상징처럼 여겨진 장동김씨<壯洞金氏>의 역사를 살펴 보는데 목적이 있다.

장동김씨의 연혁과 이력 속에는 안동의 한 향반(鄕班)이 사환충절학문문한을 바탕으로 國班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그리고 17세기를 문벌가문형성「門閥家門 形成의 시대」라고 할 때 안동김씨는 바로 그 전형이 되는 가문임에 분명하였다.

주제의 특성상 17세기에 한정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지만 안동김씨의 성장발전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의미에서 선대의 이력부터 차근 차근 추적해 보기로 한다.

 

태사의 후손(太師의 後孫)

신안동김씨의 역사는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과 함께 시작된다.

김선평은 신라말 안동(安東)의 성주(城主)로서 권행,장길(權幸張吉) 더불어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태사(太師)의 작위(爵位)를 받은 인물이었다.

지금도 안동에는 이들 3태사(太師)를 제향하는 태사묘(太師廟)가 남아 있으며,

1000년 동안 金 3姓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안동김씨는 개국공신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내내 사환학문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향역을 세습하는데 만족하였다.

심지어 세계마저 불완전하여 김선평과 김습돈 사이의 대수를 확인할 수 없으며,

청음(淸陰) 8대조 김득우(金得雨) 이전에는 산소의 위치도 알 길이 없다.

이는 같은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고려후기부터 명문으로 성장한 안동권씨와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안동김씨가 기가(起家)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청음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 때였다.

그는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전농정(典農正)을 지냈으며, 유난옥(柳蘭玉)의 손녀사위가 됨으로서 풍산유씨와의 세의(世誼:대대로 사귀어 온 정())를 확보하게 된다.

유난옥은 바로 선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서애유성룡(西厓 柳成龍) 8대조이다.

한편 김득우는 안동권씨 권흐정(權希正)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서도 가문의 입지를 더욱 신장하게 된다. 김득우는 권희정(權希正)의 딸을 외아들 김혁(金革)의 아내로 삼았는데,

권희정은 세종조에 우의정을 지낸 권진(權軫)의 아버지였다.

더욱이 김득우는 권진을 사위로 삼음으로서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사이에는 연혼중혼관계(겹사돈)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은 안동김씨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만 하더라도 안동김씨는 고려시대 이래로 단 한 명의 문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사위이기는 하지만 권진이 문과를 통해 정승의 반열에 오름으로서 그 반사적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통혼의 과정에서 김혁은 배상지,이운후(裵尙志李云候) 동서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배상지(1351-1414)는 고려말의 은사로서 유성룡은 그를 두고

“상설처럼 맑고 옥처럼 정갈하며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고절을 지킨 선비”로 평가하였다.

그의 5세손 배상용(裵尙龍)한강고제[寒岡高弟]은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7세손 배삼익(裵三益)은 이황의 고제로서 황해감사를 지냈다.

특히 배삼익의 계열은 조선후기 안동의 대표적인 명망가문으로 성장발전하였다.

이인후(李云候)는 바로 퇴계 이황의 고조부로서 진성이씨 예안 입향조였다.

이처럼 안동김씨는 혼인을 통해 안동 굴지의 명가들과 연계하였는데,

이는 곧 문호의 신장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편 안동김씨는 김득우,김혁,김삼근(金得雨金革金三近)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우선 김득우김혁 부자는 시조 이래 450년 세거지인 안동의 강정촌(江亭村)을 떠나

풍산현의 불정촌(佛頂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들의 풍산 이거는 처가이며 외가인 풍산유씨의 경제적 기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불정촌도 안동김씨의 영원한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김득우의 손자 김삼근(金三近) 대에 이르러 인근의 소요산(素耀山)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소요산은 풍산현의 치소와 5리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원래의 명칭은 금산촌)金山村이었다.

김삼근의 입거를 계기로 소산은 안동김씨의 <백세터전>으로 자리하게 된다.

현재 안동에서는 이들을 소산김씨<素山金氏>로 부르고 있으며, 안동파주서울 등 경향 일대에 거주하는 안동김씨 11개파 모두 소산에서 분파된 가문들이다.

한편 김삼근은 1419(세종 1) 사마시에 합격함으로서 ()안동김씨 초유의 생원(生員) 합격자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봉화현감비안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여 가문 내에서는 비안공(比安公)으로 불려지고 있다.

김삼근이 소산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1430(세종 12) 전후로 짐작된다.

그는 이주와 동시에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건립하여 정착의 토대를 다지는 한편 자질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이런 기반 위에서 안동김씨는 무려 550년 만에 비로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게 된다.

김삼근에게는 계권,계행(係權係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차자 김계행(金係行1431-1517) 1447(세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0(성종 11) 50세의 고령으로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김계행은 벼슬이 대사간에까지 올랐으며 청백(淸白)을 전가지지보<傳家之至寶>로 삼아 향리에서는 보백선생(寶白先生)으로 칭송되었다.

말년에는 안동부 길안면 묵계(吉安面 墨溪)로 이주하였는데,

후학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이 곳에 묵계서원(墨溪書院)을 건립하였다.

그의 가계는 안동김씨 중에서도 보백당파(寶白堂派)정헌공파(定獻公派)로 불리고 있으며,

후손 중 현달한 인물로는 월천 조목(月川 趙穆)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

김중청(金中淸1567-1629)을 들 수 있다.

김계행의 문과 합격은 안동김씨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 김삼근이 득성 이래 최초의 사마시 합격자였다면, 그는 최초의 문과 합격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동김씨는 김계행을 통해 과거의 문턱을 넘음으로서 향반(鄕班)에서 점차 도반,국반(道班國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계행은 어디까지나 장동김씨의 직계 조상은 아니었다.

장동김씨의 선대가 과거를 통해 출사하기까지는 이로부터 2(김영 김번형제의 문과급제)

더 기다려야 했다.

청음의 5대조 김계권은 과거 출신이 아닌 관계로 벼슬이 한성부판관(5)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예천권씨,권맹손(醴泉權氏 權孟孫)의 사위가 됨으로서 자식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권맹손(1390-1456) 1408(태종 8) 문과에 합격하고,

1429(세종 11)에는 문과 중시에도 합격한 수재였다.

특히 그는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세종조의 문병을 좌우하였으며,

태재 유방선(泰齋 柳方善)과 같은 문사와의 교유도 깊었다.

김계권은 모두 5자 학조,영전,영균,영추,영수[學祖永銓永鈞永錘永銖]를 두었는데,

5자 김영수가 바로 청음의 고조 장령공(掌令公)이다.

영전은 사헌부감찰합천군수를 거쳐 성종조에는 좌리원종공신에 책훈되었으며,

영균은 진사를 거쳐 봉사를 지냈으며,

영추는 문과(文科)급제 수원부사, 영수는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그러면 이들의 출사 경로는 무엇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외조 권맹손의 문음에 힘입어 출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문음의 혜택은 아들, 손자는 물론 사위, 외손에까지 두루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김계권이 장인 권맹손의 형세에 의지한다는 비판적인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는 김계권 부자의 출사와 사회적 활동에 권맹손의 영향력이 크게 미쳤음을 방증한다.

김영수는 벼슬이 (사헌부)장령에 그쳤지만 재경재관 시절 당대의 유수한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런 정황은 그가 성현에게 삼구정(三龜亭)의 기문(記文)을 촉탁하고,

그의 사후 성현과 홍언국(洪彦國)이 묘갈명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로 내정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용재 성현(慵齋)은 명문 창녕성씨 출신으로 성종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며,

홍언국 눌암(訥庵) 역시 성종조의 문형 홍귀달(洪貴達)의 아들로서 월사 이정구가 인정한 문장가였다. 삼구정은 1496(연산군 2) 김영수의 형제들이 노모 예천권씨를 위해 지은 정자로서 소산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건물이다.

특히 그는 1473(성종 4) 흥해군수 이수붕(李壽朋), 영천군수 김양완(金良琬), 경산현령 금휘(琴徽)와 더불어 영천에서 회동하여 사우계(四友契)를 결성하였는데,

이는 당시 관료 사회의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김영수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분재기,명문,호적(分財記, 明文, 戶籍) 등의 고문서가 전하지 않아 경제적인 실상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가옥의 규모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양소당<養素堂>이라 불리는 그의 가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을 구비한 전형적인 양반 주택으로서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하다.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김영수는 2아들 김영,김번(金瑛) 문과에 합격하는 영화를 누리게 된다. 김영[낙재,삼당(樂齋三塘)] 1495(연산군 1)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06(중종 1) 문과에 합격하여 좌승지 강원관찰사를 지냈다.

김번은 1498(연산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중종 8) 문과에 합격하여 시강원문학평양서윤을 역임하였다.

이 두 사람에 의해 소산의 안동김씨는 문호가 크게 신장되기에 이르는데,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이 바로 장동김씨의 시조이다.

 

소산김씨에서 장동김씨로(素山金氏에서 壯洞金氏)

문과에 합격한 김영김번 형제는 고향인 소산을 떠나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 김영은 청풍계(淸風溪)[靑楓溪], 김번은 장의동(壯義洞)[壯洞]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다만 김영은 자신의 당대에는 서울에 살았으나 손자 김기보(金箕報원주목사)는 풍산으로,

일부 후손들은 예안교하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에 김영의 집은 종증손 선원 김상용의 소유가 됨으로서,

청풍계장의동 일대는 김번 후손들의 터전이 되었다.

장의동은 17세기 중반까지 한성부 북부 명통방(漢城府 北部 明通坊)에 소속되어 있었다.

1624(인조 2) 1630(인조 8)에 김상헌이 직접 작성한 호적초본(戶籍 草本)에 따르면,

장동김씨의 경제(京第=시골에 나가 있는 사람이 '서울에 있는 본집'을 일컫는 말)

북부 명통방 제1리에 있었다.

세칭 장동이 바로 여기이다.

장의동은 후대로 오면서 장동으로 약칭되었고,북악산=백악산(北岳山=白岳山)과 관련지어

북동(北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16세기 이전에도 장동으로 불리기는 하였지만 장동이란 약칭이 보다 일반화 된 것은

19세기 이후로 생각된다.

서울의 수많은 사대부들의 주거지 가운데 조선중기까지 가장 많은 문인달사를 배출한 지역이

동리(東里)였다면, 조선후기에는 단연 장동,회동(壯洞會洞) 것이다.

장동은 경복궁의 서북쪽에 위치하였는데,

주변에는 백악산을 비롯하여 청풍계,백운동,옥류동(淸風溪, 白雲洞, 玉流洞) 등 수려한 경관이 많아 문인,학사(文人學士) 주거지로서는 매우 합당한 지역이었다.

특히 청풍계는 조선후기 문사들의 계회 장소로도 자주 이용된 명소였는데,

장동김씨들은 여기서 종회(宗會)를 개최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안동김씨들은 어떤 연고로 장동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2대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장의동은 이미 김번의 조부 김계권과 인연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록은 ‘판관공(김계권)의 부인 예천권씨가 5자를 데리고 경성(京城)의 장의동에서 풍산의 금산촌(金山村=소요산)으로 이주했다’는

동야집『東埜集』안동김씨세보『安東金氏世譜』의 기사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계권은 한성부 판관 재직시에 장의동에 거주했으며,

자녀들도 여기서 생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계권의 사망 이후 서울에서 안동 풍산의 향리로 이거하였는데,

권씨부인은 곧 대제학 권맹손(權孟孫)의 따님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수백년 동안 안동풍산 일대에 세거하며 별다른 고관을 배출하지 못한 안동김씨가 서울에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녀균분의 원칙으로 하는 당시의 상속제도와 권맹손에 대한 김계권의 의존성을 고려한다면 장의동 구거는 예천권씨 권맹손의 경제적 기반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후일 김영김번 형제가 장동에 거주한 사실에서 김번의 장의동 생활은 단순한

우거(寓居: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삶. 또는 그런 집)형태가 아니었으며,

예천권씨가 풍산 이주할 때에도 장의동의 기반을 그대로 남겨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장동은 김번의 입경을 계기로 안동김씨의 근거지로 정착되는 가운데 문벌가문의 출현을

예고하게 된다.

한편 장동으로 이거한 김번은 문과(文科) 출신이라는 기득권을 바탕으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사회적 지위를 신장해 나갔다.

이런 정황은 아들 김생해(金生海)가 중종(中宗)의 부마 물망에 오른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김생해는 초간에 그쳐 부마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景明君 李忱)의 사위가 됨으로서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문벌가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혼(國婚)이나 왕실과의 통혼이 있어야 하는 당시의 관행을 생각한다면 김생해의 혼인은 장동김씨의 성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와는 달리 김번김생해 부자에 대한 비난의 여론도 적지 않았다.

당시 이들 부자는 대단한 재력가로 소문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재력의 출처가 바로 혈통상 김번의 백부이며 세조조에 국사(國師)로 활동한 학조(學祖)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여론에 따르면, 김번은 학조의 양자가 되어 그의 재산을 물려 받았으며,

그의 아들 김생해는 왕실을 배경으로 관직에 임명되고 학조의 재산을 바탕으로 사치가 심하다는

평이 있었다.

이런 평가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김번김생해 부자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김번은 서울에 정착한 이후에도 향리 안동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가 풍산김씨 출신의 김의정(金義貞)을 사위로 맞아들이고,

만년을 위해 소산마을에 주택 청원루[淸遠樓]을 건립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김의정은 후일 5子 등과(登科)봉조,영조,연조,응조,숭조[鳳祖榮祖延祖應祖崇祖]의 영광을 누린 김대현(金大賢)의 조부로서 이 가문은 풍산유씨 유성룡 가문, 의성김씨 김성일 가문과 더불어

안동 일대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발전하였다.

청원루는 이른바 장동김씨의 영원한 <고향집>으로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장동김씨 일문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기 직전까지 여기서 은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청원루는 그의 손자 김수증,김수항(金壽增金壽恒) 형제의 독서처가 되었다.

한편 김생해는 비록 신천군수에 그쳤으나 슬하에 3자를 두었으니,

대효,원효,극효(大孝元孝克孝) 바로 그들이다.

바로 이 3인을 통해 안동김씨의 족세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대효는 삼가현령, 원효는 진사를 거쳐 군기시정, 극효는 도정을 지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이 바로 청음의 생부 김극효이다.

그는 동래정씨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의 사위이며 제자였다.

정유길은 중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손자로서 이 가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회동정씨<會洞鄭氏>로 지칭되며 조선후기 정치문화계를 풍미하였다.

이 점에서 김극효의 혼인은 안동김씨와 동래정씨가 300년 세의(世誼)를 지속하며 정치적인 밀월관계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김극효는 비록 문과(文科) 출신은 아니었지만 학식행의 그리고 <상문(相門)의 여서(女壻)>로서

일시의 명류들과 두루 교유하게 된다.

1569(선조 2)에는 당대의 홍유석사들과 회동한 일은 그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자리는 다름 아닌 장동에 살던 박태수(朴台壽)의 회갑연이었는데,

당시 김극효는 고작 28세의 나이로 원로들과 함께 참연(參宴)의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이처럼 김극효는 자신의 학행과 처가의 배경을 바탕으로 당대의 명사로 부상하게 되고

두 아들 김상용김상헌의 현달을 계기로 17세기 이후 장동김씨는 명실공히 국반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다만 김상헌은 백부 김대효의 후사(後嗣)로 들어감으로서 장동김씨 청은가문(淸陰家門)의 가통은 김번김생해김대효김상헌(⇒金生海⇒金大孝⇒金尙憲)으로 이어지게 된다.

 

장동(壯洞)과 그 주변의 저택들

안동김씨에 있어 풍산의 소산마을이 향거(鄕居)라면 장동은 말 그대로 경거(京居)였다.

김번의 입경정착 이후 안동김씨들은 주로 장동을 중심으로 주거를 형성하였는데,

김상헌의 호적에 등장하는 명통방(明通坊)의 저택은 바로 김번~김상헌으로 이어지는

장동김씨의 종가(宗家)무속헌[無俗軒]임에 분명하다.

장동이 소속된 명통방과 인근의 순화방에는 북악산인왕산 자락을 끼고 세가의 저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이,성혼,정철,신응시,조원(李珥成渾鄭澈辛應時趙瑗) 저택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기호학파의 거장들로서 장동김씨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된다.

청음은 자신의 집 주변의 경치를 근가십영<近家十詠>으로 노래하였는데,

10景은 곧 목멱산,공극산,필운산,청풍계,백운동,대은병,회맹단,세심대,삼청동,불암

(木覓山,控極山,弼雲山,淸風溪,白雲洞,大隱屛,會盟壇,洗心臺,三淸洞,佛巖)이었다.

한편 안동김씨들은 김번의 손자증손대에 이르면 족세가 크게 번창하여 주거지 역시

장동청풍계창의동 일대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풍계에 있었던 김상용의 집이었다.

원래 이 집은 그의 종증조 김영(金瑛)의 집이었다.

그러나 김영의 손자 김기보(金箕報)가 풍산으로 이주하면서 김상용이 이를 인수하여

당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이 집은 도성 제일의 산수를 자랑하는 청풍계의 아름다움을 십분 활용하여 건립되었다.

집 전방의 창옥봉에는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아담한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정자 주변에는 조심지[照心池]함벽지[涵璧池]척금지[滌衿池] 3()석지[石池]이 조성되어

그 조형미가 극에 달하였다.

이런 아름다움은 18세기 중반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겨져 오늘에 전하고 있다.

청풍계는 장안 제일의 명소답게 문인학사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1620(광해군 12)에는  김신국,이상의,민형남,이덕형,최희남,이경전,이필형

(金藎國李尙毅閔馨男李德泂崔喜南李慶全李必亨) 등이

바로 이 청풍계에서 상춘(賞春)하고 청풍계첩<靑楓溪帖>이라는 계회첩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에는 안동김씨들의 종회처로도 자주 이용되었다.

이후 김상용의 후손들이 청풍계태고정창의문을 중심으로 자하동 일대에 거주하게 되자 세상에서는 그들을 창의동김씨<彰義洞金氏>라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태고정을 위시한 김상용의 청풍계 제택(第宅)은 적어도 1927년 이전에 안동김씨 소유에서

다른 사람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새 주인의 인적 사항은 알길이 없다.

한편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의 집은 백악산 아래 장동에 있었는데, 당호는 무속헌(無俗軒)이다.

원래 이 집은 청음의 구가로서 김수항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 모두 여기서 생장하였으며,

영조대에 이르면 육상궁(毓祥宮=[영조 생모 숙빈최씨 제향처]과 담장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수항은 지위가 상승하고 자손이 증가하게 되면서 안국동,옥류동(安國洞玉流洞)

여러 지역에 제택을 마련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옥류동(玉流洞=[종로구 옥인동 부근]의 육청헌(六靑軒)으로서 후술할

6昌」의 출생지가 바로 여기이다.

6昌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경제,한성제,북동제,북리제(京第漢城第北洞第北里第)

바로 이 육청헌을 의미한다.

육청헌 주변에는  의령남씨,호곡가문(자하동),기계유씨,유척기가문(옥류동)

(宜寧南氏 壺谷家門(紫霞洞), 杞溪兪氏 兪拓基家門(玉流洞) 등이 세거하며

안동김씨와 더불어 조선후기의 명망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태고정무속헌육청헌 외에도 자하동장동옥류동 일대에는 안동김씨들의 제택들이 상당수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로서는 당시의 상황을 일일이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정선의 장동춘색<壯洞春色>을 통해 개략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안동김씨 일문이 화려한 저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풍부한 경제력에 기초한다. 전통시대의 경제력은 관직과 직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안동김씨들은 관직을 통해 경제력을 유지강화하면서 화려한 저택누정을 건립하여 상류문화를 향유했다고 할 수 있다.

 

()안동김씨의 두 현조 선원과청음(仙源과 淸陰)

입경 이후 안동김씨 가문에서 배출된 가장 현달한 인물은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 형제였다.

이들은 명실공히 가문의 현조로서 안동김씨 일문이 교목세가(喬木世家)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흔히 「이상(二尙)」으로 지칭되고 있다.

선원과 청음은 혈통상으로는 친형제였지만 청음이 백부의 후사가 됨으로서 계보상으로는 4촌간이었다. 나이는 선원이 청음보다 9살 연상이었다.

김번~김극효까지의 3대가 안동김씨의 입경정착기라면 선원청음 이후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번성을 구가하는 시기였다.

이들은 정유길의 외손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자신들의 역량을 바탕으로 16세기 후반부터 정치문화계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김상용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서 1582(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선조 23) 문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이이는 기호학파의 종사이며,

성혼은 16세기 사상계의 거장인 청송당(聽松堂) 성수침의 아들이다.

김상용이 성혼을 사사한 데에는 지역적인 연고가 깊었다.

북악산 아래 유란동(幽蘭洞)은 성수침의 독서처인 청송당(聽松堂)이 있었다.

성혼은 이 청송당을 중건하여 한동안 여기에서 살았는데,

성혼과 김상용 사이의 사제관계는 이 때 맺어졌다.

김상용은 문과에 합격한지 10년이 되지 않아 당상관(승지)에 오르는 등 환로가 탄탄하였으나 1617(광해군 9) 폐모론에 반대하여 한동안 원주에 우거하였다.

이후 인조반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병조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630년에는 인신(人臣)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32년에는 정승에 발탁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상용이 한 시대의 명현으로 칭송될수 있었던 것은 관직보다는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청나라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남문루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1758(영조 3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열사(忠烈祠강화), 석실서원(石室書院양주) 등에 제향되어 만고의 충절로 인식되었다.

그는 이정구신흠황신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시서(詩書)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전서(篆書)는 남응운(南應運1509-1587) 이후에는 최고의 필력으로 평가되어

명필 한석봉과 짝하여 여러 비문의 전액(篆額)을 썼다.

그는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있었지만 늘 겸손하였고, 청풍계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생활은 매우 청빈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문집으로 선원유고『仙源遺稿』(7)가 있다.

한편 김상헌은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성혼 우계 (牛溪)의 문인으로서 1590(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선조 29) 문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후 수찬부교리 등의 청요직을 거쳐 1608(광해 즉위년)에는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사가독서(賜家讀書)의 특전을 누렸다.

후일 그는 이 날의 영광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재명이문사가동호(再鳴以文賜暇東湖)라는

인장을 새겨 일생토록 애완하였다.

환해부침(宦海浮沈)이라 했던가?

중시 합격 이후 응교직제학승지를 역임하여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정인홍(鄭仁弘)의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반박하다 그만 광주부사로 좌천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613년에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될 때

그와 인척간(청음의 아들 광찬이 김제남의 손녀사위임)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후 그는 한동안 안동 풍산에서 우거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안동김씨의700년 숙원인 태사묘(太師廟)의 위차개정(位次改正)을 정식으로 거론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대로 태사묘는 고려 개국공신 권행,장길(權幸金宣平張吉)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서 명실공히 3姓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그런데 당시 태사묘는 안동권씨에 의해 그 운영권이 독점되고 있었고,

위차 또한 중앙의 권태사 위패가 首位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종전만하더라도 안동권씨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여 안동김씨들은 위차 개정을 쉽사리 거론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1621(광해군 13) 청음이 정식으로 안동권씨측에 위차 개정을 요구했던 것이다.

비록 청음 당대에는 요구가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수백년 관행에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안동김씨의 정치적종족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위차개정을 요구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청음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계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특유의 강경 노선을 견지하며 공신의 권력독점을 비판하고 남인 조용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명실공히 청서(淸西)의 영수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청음의 생애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 사건은 역시 병자호란이었다.

당시 예조판서이던 그는 성명을 담보로 주전론(主戰論)을 고수하였다.

당시 조정의 대세는 주화론으로 흘러 가고 있었는데,

그와 입장을 같이 한 사람은 동계 정온(桐溪 鄭蘊)등 몇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조가 마침내 출성 항복하자 그는 모든 영달을 멀리하고 안동 풍산에 우거하였다.

이 때 그가 거처한 바로 증조 김번의 구제 청원루(舊第 淸遠樓)였다.

안동에서 그는 동종(同宗)을 회합하여 선영의 묘제(墓祭)를 주관하는가 하면 풍산사민(豊山士民)들을 위해 안동부사에게 민폐의 시정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안동향안(安東鄕案)에 입록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상헌의 안동우거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1639년 청나라의 출병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만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였다.

이후 1645년에 방환되어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서 영욕의 교차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상헌은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효종이 그를 대노(大老)로 예우하며 북벌의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벼슬하지 않고 남양주 석실에 은거하다 1652 8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선원은 종사를 위해 분신(焚身)하였고, 청음은 척화(斥和)의 혹독한 대가로서 심양으로 압송되어 감금생활을 당하였지만 이들의 행적은 안동김씨의 가성(家聲)을 떨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는 후일 이들의 자손들이 서인의 청류(淸流)로 부상할 수 있는 명분적인 토대가 되었다.

 

석실서원과 석실경영 石室書院「石室經營」

안동김씨에게는 이른바 <3대거점>이 있었으니, 소산,장동,석실(素山壯洞石室) 바로 그것이다.

소산이 기가(起家)의 터전이었다면 장동은 정치문화적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근거지였다.

그리고 석실은 강학수양의 도량인 동시에 무한한 휴식의 공간이었다.

나아가 석실에는 누대의 성영(先塋)이 자리하였기에 김씨 일문은 여기를 고정(考亭)처럼 신성하게 여겼다.

바로 이 석실이 있었기에 안동김씨들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고, 퇴관은거할 수 있었으며, 산수를 더불어 자적할 수도 있었다.

이 점에서 석실은 재경 안동김씨의 정신적 구심점이요 정치문화학술의 재충전지였다.

석실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율석리 일대로서 과거에는

양주부 와공면 도씨리 석실촌(瓦孔面 陶氏里 石室村)이었다.

원래 석실 일대는 남양홍씨 홍심(洪深) 가문의 병업선영(別業先塋) 위치한 지역으로

안동김씨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그런데 김번이 홍심(洪深)의 손자 홍걸(洪傑)의 사위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소유가 되었으며,

김번과 그의 부인 남양홍씨의 산소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후 석실에는 김생해김대효김극효김상헌김광찬 등 누대의 선영이 조성되면서 명실공히

장동김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변모하였다.

안동김씨들이 석실을 일문의 고정(考亭)으로 여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석실에 주거를 형성하며 본격적인 석실경영<石室經營>에 착수한 인물은 김상헌이었다.

물론 석실에는 김상헌 이전에 이미 그의 조부 김생해(金生海)가 지은 병사(丙舍)가 있었지만 김번을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묘전,제식(墓田祭式) 마련하는 등 대부분의 위선사업은 청음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리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당 인근에 누각을 지어 일정한 주거를 마련하였다.

이 누각은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는 불치불검(不侈不儉)의 주거지로서 김상헌은 정치적 격변이나 신변상에 문제가 있으면 항상 여기에서 은거하였다.

1645(인조 23) 그가 심양에서 방환된 이후 사망하기까지 약 8년의 여생을 보낸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석실산인<石室山人>으로 자호하고 사망하기 직전까지 저술과 학문활동에 주력하였는데, <설교집(雪窖集)><길광영우(吉光零羽)><호천백(狐千白)>을 위시한 대부분의 저술들도 여기서탈고되었다. 이런 가운데 석실은 덕인장자(德人長者)의 은거지로 인식되어 기호학파 명사들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이에 석실은 서인 기호학파의 학문적인 요람으로 자리하였으며,

이 중에서도 송시열박세채는 <석실문하(石室門下)>의 고제로 부각되었다.

사실상 송시열이 효종조에 산림으로 징소될 수 있었던 것도 김상헌의 정치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김상헌에게는 남다른 기호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인장을 손수 전각하는 일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대략 100여개의 인장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실에 건립한 <군옥소(群玉所)>라는 작은 누각은 일종의 인장보관소로서 인장에 대한 청음의 기호를 대변하고 있다.

후일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청음을 인장의 <최명대가(最名大家)>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 부분은 김상헌,허목,이만부,김정희,오세창(金尙憲許穆李萬敷金正喜吳世昌)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인장 연구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한편 석실은 청음의 사망 이후 한동안 관리되지 못하여 비갈(碑碣)은 박락되고 청음의 구거는 심하게 퇴락하였다.

이에 청음의 장손 김수증은 아버지 김광찬(金光燦)의 장례을 계기로 석실 일대를 새롭게 단장하기에

이른다.

우선 그는 1668(현종 9) 향남루를 대신하여 도산정사(陶山精舍)를 건립하여 송시열의 기문을 받았다. 도산정사는 주자가 아버지 주송(朱松)을 위해 지은 한천정사(寒泉精舍)의 정신에 입각하여 건립되었다. 공교롭게도 퇴계(退溪)의 도산과 명칭이 중복된다는 혐의가 있었지만 송시열의 주장에 의해 도산정사로 명명되었다.

중당(中堂)인 송백당(松栢堂)에는 청음이 심양에 있을 당시 중국 화가 맹영광(孟英光)이 선물한 <도령채국도(陶令採菊圖)>를 걸어 두었으며,

정사 아래 바위에는 송시열의 친필 <취석(醉石)> 두 자를 새겼다.

그리고 정사의 전방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은 다음 돌기둥을 세워 <도산석실여고송오류문(陶山石室閭孤松五柳門)> 10자를 각자하였다.

도산정사는 기본적으로 선대를 추념하려는 위선의 마음에서 건립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도연명(陶淵明)에 가탁하여 청음과 곡운 자신의 은거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김수증은 도산정사를 건립하는 한편으로 김번의 묘갈을 개갈(改碣)하고, 자손들을 소집하여 묘제를 거행하는 등 석실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석실 일대에 송충이 극성하자 자식들에게 산림의 관리를 철저히 당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처럼 김수증의 정비작업에 힘입어 석실은 청음 당대의 활기를 회복하게 된다.

이후 6昌이 석실을 왕래하며 장수유식(藏修遊息) 할 수 있었던 것도 김수증의 노력에 바탕한다.

석실은 안동김씨들의 대표적 별업(別業=별장(別莊))이었다.

당시 김문에서는  안동,기전,미호,저자도,백운산,화악산,동교,동곽,철원

(安東畿甸渼湖楮子島白雲山華嶽山東郊東郭鐵源) 등지에 방대한 규모의 별업(別業)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그 비중에 있어서는 단연 석실이 압도적이었다.

 

석실서원(石室書院)

1652년 서인의 대노 김상헌이 사망하자 기호학파에서는 건원론(建院論)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에 1654년에는 양주유생의 주도와 서울경기 일대의 사류들이 지원 속에 서원 건립이 본격화 되었다. 장소는 이론의 여지없이 청음의 만년 은거지인 양주의 석실 일대로 결정되었다.

서인 영수의 서원답게 당대의 문장가 이경석(李景奭)이 상량문을 지어 서원의 건승을 기원하였고,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지어 청음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기렸다.

이어 1663(현종 4)에는 현종에 의해 <석실(石室)>이라는 편액이 내림으로서 석실서원은 명실공히 안동김씨의 정신적 구심점이요 기호학파의 정치사회학문적 연수(淵藪)로 자리하게 된다.

당초 석실서원에는 선원청음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선원은 석실과 연고가 없었지만 청음과는 가정적으로는 형제요 국가적으로는 <양충(兩忠)>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제향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선원청음을 가문의 양대 현조로 고양시키려는 안동김씨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선원청음의 위패는 병향의 형태로 봉안되었지만 석실서원의 상징이요 표상은 어디까지나 청음이었다.

영남에 도산서원옥산서원이 있고, 호서에 돈암서원화양서원이 있다면 경기에는 석실서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석실서원이 경기 일대의 노론 기호학파 내부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보장받았음을 의미한다. 조선후기의 정치학풍문화를 거론함에 이있어 석실서원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으로는 양주의 도봉서원(道峯書院)[조광조,송시열(趙光祖宋時烈)],

용인의 심곡서원(深谷書院)[조광조(趙光祖)]충열서원(忠烈書院)[정몽주(鄭夢周)]과 더불어

서인(노론)의 공론을 주도하였고,

학문적으로는 김창협김창흡김원행을 중심으로 근기일대의 학풍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석실서원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의 학맥은 호락논쟁(湖洛論爭)의 과정에서 락논(洛論)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 점에서 석실서원은 낙론의 학문점 구심점이요 근거지였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석실서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1868(고종 5) 대원군에 의해 당쟁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철폐된 이래 복원되지 못하였고,

관계 문헌도 산실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지명으로 경기도 미금시 수석동(서원말) 일대에 서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1740-1741년 경에 그려진 겸재(謙齋) <석실서원도(石室書院圖)>에 서원의 실경이 묘사되어 있어

위치 비정에 참고가 된다.

그리고 국민대학교 정만조(鄭萬祚) 교수를 중심으로 한 현장답사 결과에 따르면,

조말생(趙末生)의 신도비(神道碑) 인근이 서원의 구기로 파악되고 있다.

양주목의 고지도류에 의하면,

석실서원의 위치는 독음면(禿音面) 또는 금촌면(金村面) 일대의 한강변 미호,미음(渼湖渼陰)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평구역(平邱驛)과도 매우 인접해 있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석실서원은 김상헌이 살던 석실촌(石室村)에서 한강쪽으로 약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건립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일찍부터 안동김씨의 별업(別業)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서원을 석실촌이 아닌 한강변에 건립한 것은 이 지역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수로육로를 통한 원활한 교통 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황윤석(黃胤錫)의『이재난고(齋亂藁)』에 따르면, 동대문(東大門)에서 미음(渼陰)까지의 거리는 30리였으며, 서울에서 석실서원석실로 가지 위해서는 수구문⇒두모포⇒광진촌⇒미음촌을 거쳐 석실서원⇒석실에 이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통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석실서원은 김상헌의 명망을 바탕으로 서인(노론)의 본산으로 정착되는 가운데 김창협김창흡김원행을 거치면서 정치사회학문적 입지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숙종~경종조(肅宗~景宗朝)의 정치적 격변과 안동김씨

안동김씨는 선원과 청음의 정치적 후광에 힘입어 17세기 중반 이후 서인의 핵심 가문으로 성장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김광찬이 영흥부원군 김제남(延興府院君 金悌男)의 손녀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청음의 정치사회적 지위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김광찬은 1627(인조 5) 생원시에 합격한 다음 음직으로 세마공조좌랑형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정치적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청음 이래 안동김씨가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흔히「삼수(三壽)」로 일컬어 지는 김광찬의 아들 수증수흥수항 3형제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안동김씨는 창녕조씨, 안정나씨, 용인이씨, 풍산홍씨, 전주이씨, 은진송씨, 한산이씨등 당대의 명문(名門)들과 통혼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더욱 확장하고 있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장자 스증(壽增)은 음직으로 공조참판, 차자 수흥(壽興) 3자 수항)壽恒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에 오름으로서 현종 후반부터 정치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 3형제는 서인(노론)의 영수로서 양송(兩宋)으로 칭송된 송시열송준길과는 사우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양송과 더불3宋으로 불린 송규렴+제월당(宋奎濂=霽月堂)은 바로 이들의 매부이기도 하였다.

이는 안동김씨가 당시 호서사림의 영수3송과 학문 또는 혈연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후일 김창협 형제가 송시열을 사사종유한 것도 부조(父祖)에 의해 형성된 세의(世誼)의 확인이요 강화라 할 수 있다.

김수항은 1646(인조 24) 진사시에 장원하고 1651(효종 2)에는 문과에도 장원한 수재였다.

그러나 김수항은 탁월한 재능과는 달리 온건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그가 손자들의 항렬을 <()> 字로 명명한 것도 겸퇴(謙退)를 매우 중시했던 자신의 인생 철학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1655(효종 6)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의 특권을 누린 다음 이조정랑,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72(현종 13)에는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인 1673년 중형 김수항이 영의정에 오름으로서 한 집안에서 시임(時任) 정승 2인이 배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때까지만 해도 김수항 형제는 교목세가의 자손으로 정치사환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674(현종 14)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서인,남인(西人南人) 사이에 정국변동이 수반되면서 안동김씨는 미증유의 시련을 겪기에 이른다.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정권이 수립되면서 서인의 당국자들은 정치적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서인 정국의 영도자인 이들 형제가 무사할 수는 없었다.

이에 김수흥은 춘천(春川)으로 유배되고, 김수항은 영암(靈巖)[1678년 철원으로 이배됨]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청음 이래 안동김씨가 직면한 최초의 가화(家禍)였다.

청음의 심양에서의 감금생활이 외침에 따른 질곡이었다면 수흥수항 형제의 유배는 당쟁에따른파국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가화는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1680(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김수흥김수항 역시 해배되었고,

이후 약 10년 동안 형제가 번갈아 가며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김수항은 정치적 입장이 비교적 온건하였지만 정국운영의 과정에서 남인들의 반감도 적지 않게야기하였다.

우선 남인들은 경신환국 당시 각기 남인의 영수이며 이론가인 허적윤휴(,許積) 죽음, 남인의 명가

「목민유삼가(睦閔柳三家)」사천목씨,여흥민씨,진주유씨((泗川睦氏驪興閔氏晉州柳氏)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김수항의 책임으로 돌렸다.

영남 남인 또한 이원정(李元禎)의 죽음, 김성일(金誠一)의 시호(諡號) 문제과 관련하여 김수항에 대한 반감이 깊었다.

이런 상황에서 1689(숙종 15) 기사환국이 발생하여 다시 한번 남인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동김씨는 정변에 따른 두 번째의 가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김수항은 이담명김방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그의 김수흥 역시 장기로 유배되어 이듬해인 1690년에 사사됨으로서 극심한 가화를 치루게 되었다.

한편 김수항은 죽음에 임하여 5아들 창집창협창흡창업창집에게 6조항의 유서를 통해 선대의 봉사, 자신의 치상(治喪)과 묘도의 석물 등에 대한 지침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이 외에도 그의 유서에는 신하로서 진충보국 하지 못했으며, 학문을 성취하지도 못했으며,

산수와 더불어 여생을 즐기지 못한 회한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식들에게 청음(淸陰)에 의해 다져진 충효,문헌가(忠孝文獻家)로서의 전통을 계승할 것을 당부하는 가운데 과거와 사환을 자제할 것을 은유하였다.

이는 정변에 휘말려 죽음을 앞둔 노부가 자식들에게 일러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신책이었다.

이 유서는 김창협김창흡 등이 정계를 단념하고 우유산수(優遊山水)하며 학문에 몰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극심한 가화에도 불구하고 장자 김창집은 아버지를 이어 노론의 거두로 활동하였다.

그는 1672(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4(숙종 10) 문과에 합격하여 기사환국 이전까지 중견관료로 활동하였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으로 김수항이 사사되자 한동안 은거하였다가 1694(숙종 20) 갑술환국 이후에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내외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1712(숙종 38)에는 사은사로서 청나라를 다녀 오기도 하였다. 이어 1717(숙종 43)에는 영의정에 오름으로서 <부자영상(父子領相)>의 광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안동김씨에게는 서서히 세번째 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김창집은 숙종이 사망하자 원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한편 1721(경종 1) 8월에는 이른바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인 이이명(=영중추)조태채趙泰采=판중추)이건명(李健命=좌의정)과 합의하여 연잉군(영조=英祖)를 왕세자(王世子)로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비상적인 방법이 취해진 것은 경종이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대통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노소당쟁의 쟁점으로서 언제라도 당화가 발생할 수 있는 초미의 사안이었다.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에 성공한 노론의 집행부는 동년 10월에는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였다. 예상대로 소론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대리청정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사태는 이 때부터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년 12월 소론의 급진파 김일경(金一鏡)등이 상소하여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경종에 대한불경불충으로 간주하여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김일경의 상소를 접한 경종은 노론사대신을 위리안치 시키고 50-60명의 노론 인사를 처벌하였다.

그러나 1722(경종 2) 3월 노론 명가의 자제들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인해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명가의 자제는 다름 아닌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등이었다.

이런 내막을 통해 김성행, 이기지는 국문 도중에 사망하고 노론사대신 또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도 연루되어 부녕의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이는 1689(숙종 15) 김수항의 사망 이후 약 30년만에 닥친 세 번째의 가화로서 김창집김제겸김성행 3대가 일시에 화를 당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들은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복관되었다.

특히 김창집은 당화에 따른 반대 급부로서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사충서원(四忠書院=과천)과 반곡서원(盤谷書院=거제)에도 제향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Case와 접하게 된다.

안동김씨 가문에는 당쟁의 와중에서 <일묘사충(一廟四忠)>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는 김씨 일문의 자랑만이 아니라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사례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국가에서 김수항김창집김제겸김성행 4대의 충절을 인정하여 명부조의 은전을

내린 것이다.

가문 내에 한 사람의 불천위만 있어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인데,

김수항 가문에는 직계로 4대가 불천위(不遷位)가 되었으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김성행의 아들 金履長을 기준한다면 가묘 안에 고조증조고의 신주가 불천위가 되는 셈이다. 이는 안동김씨가 충절학문을 가문의 상징으로 표방할 수 있는 신표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선대의 위업을 바탕으로 안동김씨는 영조 이후에도 노론의 핵심으로 성장발전하였다. 그리고 순조 이후에는 세도정치의 주체로 부상하면서 세상에서는 그들을<장김(壯金)>으로지칭하게 되었다.

다만 <장김(壯金)>이라는 명칭 속에는 명문을 대변하는 긍정적인 의미 외에 권력 독점을 풍자하는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거(隱居)의 실현 곡운(谷雲)과 곡운구곡(谷雲九曲)

충효청백이 청음가문을 유지하는 내적 모토였다면 산수에 대한 열정은 심신 수양을위한 외적 지향이었다.

그들은 명산대천이 유혹하고, 환해(宦海)에 지치고, 현실에 대한 분노가 치밀면 언제라도 여장을 꾸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산수에 대한 열망과 탐닉은 청음가문의 전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청음은 춘천의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연광정,백상루,강선루,악민정,청심루(練光亭百祥樓降仙樓樂民亭淸心樓) 등 일국의 형승을 죄다 품평하며 산수에 대한 자신감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그의 손자 김수항은 한강의 저자도(楮子島)와 영평의 백운산(白雲山)에 별업을 마련하여 만년을 보내려 하였으나 정쟁에 희생됨으로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수흥 역시 서울 인근의 동곽(東郭)에 별장을 설치하고 퇴관은거하려 했지만 비명에 목숨을 잃고말았다.

이들 3형제 중에서 산수의 묘미를 만끽하고 은거의 의지를 실현한 이는 오직 김수증 한사람 뿐이었다. 이는 수흥수항 형제가 일생 환로에 매여 있었음에 비해 김수증은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살았기때문이었다.

김수증 역시 기환자제로서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종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7세 되던 1670(현종 11) 이후에는 일체의 벼슬을 단념하고 오로지 야인,은사(野人隱士)로서의 삶을 갈망하였다.

그가 희령산,청룡산,개성,백사정,곡연,금강산등 전국의 경승들을 두루 유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런 갈망의 산물이 바로 화악산(華嶽山)의 곡운(谷雲)이었다.

곡운 일대는 이원(李愿)의 반곡(盤谷)에 손색이 없고 기리계(綺里季)의 상안(商顔)이나 왕유(王維)의 망천장(輞川莊)에 비길만큼 천감토비(泉甘土肥)하고 동부(洞府) 그윽한 복지였다.

바로 이러한 복지 위에 김수증은 30년의 세월을 투자하여 희한(稀罕)의 별세계를 구축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다.

장동과 석실만을 오가던 김수증이 곡운 입거를 마음 먹은 것은 1668(현종 9) 무렵이었다.

당시 평강현감으로 부임하던 그는 곡운의 풍광을 접하고서 복거의 의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670(현종13)가을 그는 세간의 부귀와 영화를 멀리하고 곡운 입거를 단행하였다.

그는 곡운에 입거하자마자 지명부터 사탄(史呑)에서 곡운(谷雲)으로 고치는 일에 착수하였다.

곡운이라는 명칭은 주자의 <운곡(雲谷)> 고사(故事)에서 취한 것으로 주자에 대한 경모심의 소산이었다. 그 다음으로 7간 모옥을 지어 곡운 일대가 자신의 구역임을 천명하였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1675(숙종 2)에는 서울의 가족들을 곡운으로 이주시켰다.

그가 솔가(率家)를 쉽게 결정한 것은 당시는 정쟁의 와중에서 두 아우 수흥수항이 유배되던 어수선한 시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솔가와 더불어 김수증의 곡운경영도 본격화 되었다.

우선 그는 3간의 곡운정사를 건립하여 은거의 의지를 더욱 분명히 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송시열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평소 김수증의 연하벽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원래 곡운 일대는 일찍이 김시습이 은거한 지역이었다.

이에 그는 김시습을 추종하는 마음에서 골짜기를 채미(採薇)로 이름하고,

곡운정사 안에는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는 주자에 대한 존경심과 김시습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곡운,채미(谷雲採薇)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한편 김수증은 곡운정사의 낙성에 이어 농소정(籠水亭)을 새로이 건립하여 곡운경영에 박차를 가하였다.

<농수(籠水)> <고교류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이라는 최치원(崔致遠)의 시어(詩語)에서 취한 말로서 여기에는 세간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여망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곡운경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묘,방실,회랑,마구,주방(家廟房室回廊馬廐廚房) 등의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단계로까지 진척되었다.

이 점에서 김수증의 곡운 입거는 단순한 우거가 아닌 완전한 이주를 의미했다.

이로부터 그는 약 10년 동안 몰아의 심정으로 한적한 삶을 향유하게 되는데,

1677(숙종 3) 1678년 두 차례에 걸쳐 칠선동(七仙洞)을 유람한 것은 자신을 신선에 비기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면서도 와룡담(臥龍潭) 일대를 <신석실(新石室)>로 이름한 것은 석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1681(숙종 7) 김수증은 신병으로 인해 출산(出山)하여 무려 7-8년 동안이나 곡운을 비우게 되었다. 그가 다시 화악산을 찾은 것은 1689(숙종 15)이었다.

이 때는 바로 기사환국이 발생하여 두 아우 수흥수항이 사사되던 시기였다.

재입산 이후 김수증은 이른바 화음동경영(華陰洞經營)에 주력하게 된다.

화음동은 곧 백운계 일대로서 곡운정사에서 4-5리 정도 떨어진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재입산 하던 그 해에는 <요엄유정(聊淹留亭)>이 낙성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부지암이 완성되었다. <부지(不知)> <만사무여수부지(萬事無如睡不知)>라는 육방옹(陸放翁)의 시어(詩語)에서 취한 말로서 세상을 외면하려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부지암 왼편에는 자연실(自然室)이라는 주거공간을 마련하였는데,

거기에는 돌절구랑 방앗간도 있었고, 함청문이라는 사립문도 있었으며, 한천정이라는 우물도 있었다. 한천정 아래의 청여허당(淸如許塘)에는 대를 쌓아 <표독립(表獨立)>으로 제자(題字)하고,

요엄유정과 표독립대 사이에는 황국(黃菊) 수백 포기를 심어 <만향경(晩香徑)>이라 이름하였다.

이 외에도 요엄유정 주변에는 천관석,무망교,음송암,석문오,용운대(川觀石趨眞橋蔭松巖石門塢舂雲碓) 등 자연인공의 경관이 조성되어 은거의 운치가 극에 달하였다.

그렇다고 김수증이 감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 단적인 근거가 바로 三一亭일 것이다. 삼일정은 총계봉 아래에 자리하여 요엄유정과 마주하고 있었다. <三一>이라 이름한 것은 공교롭게도 이 건물에는 기둥이 3개이고 들보가 1개였기 때문이다.

삼일정에는 김수증의 사유체계가 집약되어 있었다.

이런 면은 삼일정의 기둥과 들보 그리고 주변의 바위에 새겨진 기호와 문자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우선 들보의 바닥에는 태극도와 8괘를 그렸고, 3개의 서까래에는 <음양(陰陽)><강유(剛柔)><인의(仁義)> 8분서(分書)로 제자하였으며, 3기둥에는 64괘를 새겨 두었다. 그리고 3기둥을 8등분하여 24면을 만들어 24절기(節氣), 12벽괘(壁掛), 12(), 12간지(干支)를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주자의 <각조산고사(山故事)>에 의거하여 삼일정 아래 평평한 바위에 하도낙서(河圖洛書, 선천후천팔괘,태극도(先天後天八卦, 太極圖)를 새겨 인문석이라 이름하고, <()><()><()><()><인문석(人文石)> 7자를 전자(篆字)로 새겼다.

이처럼 삼일정인문석에는 삼라만상이 오묘하게 담겨있었는데,

이는 역학상수학에 정통한 김수증의 학문적 관심과 생의 지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김수증은 인간에 대한 경모심을 유지당을 통해 표현하였다.

유지당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라 삼일정 부근에 지은 무명와(無名窩)에 딸린 1간의 당실이었다.

여기에 그는 재갈량과 김시습의 화상을 봉안하고 경모의 마음을 담았다.

원래 그는 곡운정사 안에 이들의 화상을 봉안하려 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유지당으로 대신한

것이었다.

유지당의 미간에는 출사표의 <홍의충장망신우국국궁진역사이후이(弘毅忠壯亡身憂國鞠躬盡力死而後已)> 16자와 김시습의 시구를 게시하였는데, 전자는 송시열의 친필이라 한다.

이처럼 김수증의 곡운경영은 방대하고도 치밀하였다.

지형과 산수를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함으로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곡운경영의 면면 속에는 그의 사고들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강렬한 바램이 있었고,

주자에 대한 경모심과 제갈량김시습에 대한 추념도 있었으며,

세상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의 마음도 있었다.

이 점에서 김수증의 곡운 은거는 단순한 연하벽(煙霞癖)으로 치부할 수 만도 없었다.

김수증에 있어 곡운은거의 백미는 역시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경영에 있었다.

곡운구곡은 곡운정사화음동 일대의 9경승처(九景勝處)로서 구곡 설정의 모티프는 역시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었다.

화악산의 은거지를 곡운으로 명명하고 자호로 삼은 것이 주자의 삶을 답습하기 위한 시발적 단계라면, 곡운구곡의 설정은 그러한 의식의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어쩌면 김수증은 곡운구곡을 통해 무이구곡을 재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김수증이 곡운구곡의 경영에 착수한 것은 은거 초기인 1670(현종 11) 경이었다.

그는 곡운 일대의 승경들을 일일이 답사하여 구곡을 설정하였다.

원래 이 일대는 산수 유려하여 예로부터 은자의 반환처로 각광을 받았으며,

김시습의 족적이 미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따라서 매 경승마다 나름대로의 명칭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김수증은 곡운구곡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명칭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꾸었다.

이는 곡운구곡의 설정이 명칭의 변경에서 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계류를 따라 경관들을 일일이 답사하여 경관에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거나 예전의 명칭을 개명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방화계(傍花溪=소박삽(小樸揷의 개명),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여기정(女妓亭)의 개명), 수운대(水雲臺=청은대(淸隱臺), 백운담(白雲潭=백운계(雪雲溪), 열운대(悅雲臺), 명옥뢰(鳴玉瀨), 와룡담(臥龍潭=용연(龍淵)의 개명), 귀운동(歸雲洞=일명 신석실(新石室),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臺)의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만을 모아 이른바 곡운구곡을 설정하였으니,

방화계(傍花溪=1),청옥협(靑玉峽=2),신녀협(神女峽=3),백운담(白雲潭=4),명옥뢰( 鳴玉瀨=5), 와룡담(臥龍潭=6),명월계(明月溪=7),융의연(隆義淵=8),첩석대(疊石臺=9)가 바로 그것이다. 김수증의 표현에 따르면 방화계(1)에서 첩석대(9)까지의 거리는 대략 10여리였다.

이 중에서도 6曲와룡담(臥龍潭)의 상류인 귀운동 일대가 가장 수려하였는데,

곡운정사농수정을 지어 新石室로 이름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그리고 제갈량과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유지당(무명와의 부속) 8곡 隆義淵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곡운구곡(谷雲九曲)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김수증만의 비경이었다.

그러던 중 1682(숙종 8) 평양 출신의 화가 조세걸(曺世傑1628-1705)에 의해 <곡운구곡지도(谷雲九曲之圖)>라는 화첩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화첩에는 농수정의 전경을 시작으로 곡운구곡의 9장면 담겨져 있다.

화자는 비록 曺世傑이지만 곡운구곡도에는 김수증의 회화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김수증은 조세걸을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매 곡을 임사하게 하여 구곡의 전경을 핍진하게 담아낼수있었다.

이 점에서 곡운구곡도는 실경산수화의 선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의 전반적인 구도는 김수증의 의사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곡운구곡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692년 경이었다.

이 때 김수증은 두 아들 창국,창직(昌國昌直),

조카인 창집,창협,창흡,창업,창집(昌集昌協昌翕昌業昌輯),

외손 홍유인(洪有仁)에게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차운하게 하는 한편 창협에게 발문을 쓰게 하여 <곡운구곡지도(谷雲九曲之圖)>라는 화첩을 정식으로 꾸미게 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 김수증이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자신이 손수 명명하였고,

만년을 기약한 곡운구곡이었기에 이를 화폭에 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곡운구곡도는 김수증이 곡운을 떠나 있을 때 곡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사실 김수증은 만년을 곡운에 의탁하였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出山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바로 이 출산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바로 화첩의 제작이었던 것이다.

이후 김수증은 1701년까지 전후 약 30년을 곡운에서 은거하다 1701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기환자제로 태어났지만 세속적인 영달보다는 은사이고자 노력했던 김수증이었다.

그의 삶의 모습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가 살던 곡운의 형상만은 예전 그대로이며,

삶의 기풍은 산중(山中)의 고사(故事)가 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산소는 양주 석실의 선영에 있다.

 

안동김씨의 혼맥

17세기 안동김씨의 혼맥은 당대 최고의 문벌가문에 두루 걸쳐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안동김씨는 유수한 가문들과 혼인을 통해 정치사회적 기반을 강화하며 가격을 신장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경거(京居=장동(壯洞)의 터전을 잡은 김계권(金係權)과 예천권씨 권맹손여(權孟孫女)와의 혼인, 석실경영(石室經營)의 계기를 마련한 김번() 남양홍씨 홍걸여(洪傑女)와의 혼인, 왕실혼(王室婚)의 단초를 연 김생해(金生海)와 전주이씨 경명군여(景明君女)와의 혼인, 상문(相門=재상을 배출한 집안)의 사위가 된 김극효(金克孝)와 동래정씨 정유길여(鄭惟吉女)와의 혼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안동김씨 청음계열은 16세기 후반 이래로 서울 일대의 유수한 명가들과 통혼하며 당대 최고의 혼반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청음 자신은 성주이씨 이의로(李義老)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이의노는 태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형재,이직(亨齋,李稷) 5세손으로 아들 이욱(李稶)과 이직(李稙)은 각기 강원감사와 승지를 지낼 정도로 현달하였다.

청음의 아들 김광찬은 연안김씨 김제남(金悌男)의 손녀와 혼인하였는데,

김제남은 바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아버지로서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외조였다.

물론 김광찬은 계축옥사(癸丑獄事)의 와중에서 연안김씨와 강제 이혼하는 곡절을 겪기도 하였지만 한때나마 국구(國舅)의 지위를 누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의 손서(孫壻)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안동김씨는 청음의 손자대에 이르러 자손의 수가 증가하면서 창녕조씨 조한영계(曺漢英系), 남원윤씨 윤형각계(尹衡覺系), 안정나씨 나성두계(羅星斗系), 용인이씨 이정악계(李挺岳系),

풍산홍씨 홍주천계(洪柱天系), 전주이씨 이중휘계(李重輝系), 은진송씨 송규렴계(宋奎濂系),

한산이씨 이광직계(李光稷系), 양천허씨 허적계(許積系) 등으로 통혼권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17세기 서인정권의 핵심가문들이었다.

조한영은 인조조 공조참판을 지낸 조문수(曺文秀)의 아들로서 문과에 장원하여 경기감사를 지내고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진 일세의 수재였다.

어릴적부터 신동(神童)의 소리를 들으며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문과에 장원한 조하망(曺夏望)은 그의 손자였고, 필법으로 명성을 날린 송하,조윤형(松下,曺允亨)은 종증손이었다.

후일 이 가계는 정치적으로는 소론을 표방하여 안동김씨와는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

나성두는 문과에 예조참의를 지낸 나만갑(羅萬甲)의 아들이었다.

그는 수몽,정엽(守夢,鄭曄)의 외손으로서 송준길(宋浚吉)과는 사돈관계를 형성하는 등 서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윤선거(尹宣擧)의 문인이었던 아들 나양좌(羅良佐)가 회니시비(懷尼是非) 당시 윤증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과정에서 이 가계 또한 소론이 되었다.

한편 청음의 손서(孫壻)인 이정악, 홍주천, 이중휘, 송규렴, 이광직 역시 명가의 후손들이었다.

특히 이정악은 숙종조 영의정을 지낸 이세백(李世白)의 아버지였고,

홍주천은 판서를 지낸 홍만조(洪萬朝)의 아버지였으며, 이중휘는 영의정을 지낸 이유(李濡)의 아버지였다. 송규렴은 3宋의 한사람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며, 이광직은 부제학을 지낸 이홍연(李弘淵)의 아들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비록 서출이지만 청음에게는 허견(許堅)에게 출가한 손녀가 있었는데, 허견은 숙종 초기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였다.

이 시기는 아직 당내혼(黨內婚)이 일반화 되지 않았고, 서출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서인남인의 핵심 가문 사이에 통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지 않을 수 없다.

청음가문의 혼반이 보다 확충된 시기는 역시 청음의 증손대인 「창()」자 항렬에서였다. 正室 자손에 한정할 때 청음에게는 모두 9명의 증손과 5명의 증손녀(曾孫女)가 있었다.

이들의 통혼권은 전주이씨 이정영계(李正英系), 덕수이씨 이식계(李植系), 남양홍씨 홍구성계(洪九成系), 한산이씨 이병천계(李秉天系), 평산신씨 신진화계(申鎭華系), 기계유씨 유명건계(兪命健系),

반남박씨 박세남계(朴世楠系), 연안이씨 이단상계(李端相系), 경주이씨 이세장계(李世長系),

전주이씨 익풍군계(益豊君系), 남양홍씨 홍처우계(洪處宇系), 전주이씨 이섭계(李涉系) 등 서인의 주요 가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중 김창국(金昌國)의 장인인 이정영은 석문,이경직(石門 ,李景稷)의 아들로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손자 이진유(李眞儒)는 경종조 소론 강경파의 영수로 활동하였다.

김창숙(金昌肅)은 택당,이식(澤堂,李植)의 손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식은 곧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문한은 아들 이단하(李端夏)에게 그대로 이어져 이 가계는 연안이씨 월사가문과 함께 서인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문한가(文翰家)로 성장하였다.

한편 김창협의 장인 이단상(李端相)은 이정구의 손자로서 17세기 중반 서인을 대표할만한 학자관료였다. 그의 학문은 사위 김창협에게 계승되어 후일 낙론(洛論) 형성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단상과 김창협의 관계는 혼맥과 학맥의 연관성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였으며,

두 사람 모두 학문적 공로가 인정되어 석실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창흡의 장인 이세장(李世長)은 선조말~광해조 서인의 영수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었으며,

김창립의 장인 이민서(李敏) 숙종조에 이조판서와 문형(文衡)을 역임한 명사였다.

이세장 계열이 점차 소론을 표방하였다면, 이민서 집안은 골수 노론 가문으로서 아들 이건명(李健命)은 신임옥사(辛壬獄事) 당시 김창집,이이명,조태채(金昌集趙泰采) 함께 화를 당한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17세기 청음가문의 혼맥은 서인의 명가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서인 중에서도 노론계열의 비중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국혼(國婚)을 맺지는 못했지만 당시 청음가문의 혼반은 국반(國班)의 지위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6昌」

우리는 흔히 김수항의 6아들을 가리켜 6창 창집,창협,창흡,창업,창집,창립,

(昌集昌協昌翕昌業昌緝昌立)이라 부른다.

저마다 정치학문문화예술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었기에 <6>은 이들에 대한 존칭처럼 여겨지고 있다.

선원과 청음에 의해 안동김씨의 문벌적 기초가 다져졌다면 6창은 이를 더욱 확충시킨 사람들이었다. 충절과 학문을 바탕으로 하는 안동김씨의 가성(家聲)에 문화적인 격조를 불어 넣은 사람이 바로 6창이었던 것이다.

6창이 살던 시대는 정치학술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당쟁의 와중에서 무수한 희생이 초래되었다.

안동김씨의 경우에도 김수흥수항 형제는 기사환국으로 희생되었으며,

김창집김제겸김성행은 신임옥사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창협창흡창업창집 형제가 정치보다는 학술문화 방면으로 관심을 돌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학술적으로는 학문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노론 기호학파가 경향분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기호학파는 송시열을 존숭하는 호서계열과 이단상조성기김창협김창흡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계열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6창의 당대에는 양대계열이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이들의 사후 김원행 대에 이르면 이른바 호론(湖論=호서)과 낙론(洛論=서울)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이른바 <호낙논쟁(湖洛論爭)>의 와중에서 낙론의 종사(宗師)로 인식된 사람이 바로 김창협이었던 것이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시사(詩社) 활동이 왕성해지고 진경산수화의 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 때 6[특히 창협과 창흡] <백악시단(白岳詩壇)>을 통해 한 시대의 문단을 주도하는 한편 문인 이병연,정선(李秉淵鄭敾) 통해 진경문화를 선도하기에 이른다.

6창은 친형제답게 삶의 방향과 개인적인 취향에 있어 너무도 유사점이 많았다.

맏형 김창집은 정치가로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아래의 동생들은 학자문사시인화가로서 당대를 풍미하였다.

특히 김창업은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송시열초상(宋時烈肖像)>(77세시) 등의 명품을 남겼다.

그의 화재(畵才)는 아들 윤겸(允謙=서자)에게 이어져 진경산수화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막내인 김창립은 대제학 이민서(李敏) 사위로서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으나

1683 1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 때 김수항은 제문(祭文)을 지어 망자(亡子)의 명복을 빌는 한편 손수 행장을 꾸며 18년 동안의 생애를 일일이 기록하였다.

한편 6창은 산수 유려한 명소에다 별장을 마련하여 누정당실을 건립하고 학문과 시문을 숙성시키는 도량으로 삼았다.

김창집에게는 육청헌(六靑軒=서울)금촌별장(金村別莊=양주)이 있었는데,

정치적 곡절이 있을 때는 금촌으로 퇴거하여 휴양하는 일이 많았다.

김창협의 주된 거처는 백운산의 농암(農巖)과 삼주(三洲)의 삼산각(三山閣)이었다.

김창협이 백운산에 입거하게 된 것은 친명에 의해서였다.

원래 백운산에는 김수항의 별업이 있었는데,

김수항은 자신이 복거하기에 앞서 아들 창협을 보내 미리 경영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그의 나이 29세 되던 1679(숙종 5) 8월 응암(鷹巖)에 입거하여 이듬해인

1680년에는 은구암(隱求菴)을 지어 생활하였다.

그러다 1692(숙종 18)에는 응암에서 농암(籠巖)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농암(籠巖) <농암(農巖)>으로 고치고 자호하였다.

여기서 그는 서실(書室)관실,호월헌(觀室壺月軒)을 건립하고 서실 앞에는 두 방당(方塘)을 조성하고는 농암수실(農巖樹室)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곳 농암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으로 청냉로(淸泠瀨)위에 정자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94년 시사(時事)가 일변하면서 석실서원 인근의 삼주(三洲)로 나와 삼산각(三山閣)을 짓고 살았다.

물론 김창업의 별장이 있던 석곶촌(石串村)과 이유(李濡)의 별장인 녹천(鹿川)에 우거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고종처(考終處)는 삼주(三洲)의 삼산각(三山閣)이었다.

한편 김창흡은 호산호수(好山好水)의 기질 때문인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별장은 서울경기강원도 일대에 방대하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철원의 삼부연,백악산(三釜淵, 白岳山) 아래의 낙송루(洛誦樓),한강의 저자도(楮子島),양근(楊根)의 벽계(蘗溪), 설악산(雪嶽山)의 영시암,갈역정사(永矢菴葛驛精舍), 화악산의 곡구정사(谷口精舍)이다.

삼부연은 철원의 풍전역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용화촌(龍華村)에 위치하였는데,

동부가 그윽하고 가마솥 모양의 3연못이 있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일찍이 김상헌은 1631(인조 9) 예조판서로서 이 근방을 지나다가 삼부연을 유람하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로서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으며,

1678(숙종 4)에는 김수항이 영암에서 철원으로 이배되면서 삼부연을 유람하였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김창흡은 1679(숙종 5) 삼부연에 복거하고 삼연(三淵)으로 자호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2년 남짓 매우 소박한 삶을 보내다 1681(숙종 7) 친명(친명(親命:부모의 명령)에 의해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낙송루(洛誦樓)는 김창흡이 백악산 아래에 마련한 경제(京第=임시로 시골에 나가 있는 사람이 서울에 있는 본집을 이르는 말)에 부속된 작은 누각이었다.

삼부연에 대한 미련이 깊어 낙송루 아래에 3부연을 형상하고 동지들과 더불어 독서하며 시를 읊었는데, 이 낙송루는 후일 <백악시단(白岳詩壇)>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저자도 별장은 그의 나이 35세 되던 1687(숙종 13)에 조성되었다.

그는 저자도의 한 구역을 현성(玄城)으로 명명하고 복거하였는데,『삼연집(三淵集)(3)에 수록된 <현성잡영(玄城雜詠)>(10)은 저자도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이 즈음 김수항 역시 저자도에 복거할 마음이 있어 김창흡에게 정자를 지어 먼저 거주하게 하였는데, <저도신거상량문(楮島新居上樑文)>은 바로 이 때 지어진 글이다.

양근의 벽계(蘗溪)는 일명 노문리(蘆門里)라고도 하는데, 사암,박순(思菴,朴淳)

동강,남언경(東岡,南彦經)에게 허급한 땅이라 한다.

김창흡은 벽계에 입거하기 전에 인근의 국연(菊淵)에 정착하였으나 호환(虎患)으로 인해

1693(숙종 19) 9월 이 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개울을 황벽,당실(黃蘗, 堂室)을 함벽(含蘗)이라 명명하고,

1695(숙종 21) 석실의 송백당(松栢堂)으로 이거하기까지 약 2년을 살았다.

벽운정사(碧雲精舍) 1707 (숙종 33) 설악산의 오세암(五歲菴)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일찍이

백부 김수증(金壽增)이 점지해 준 곳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라는 시어(詩語)에서 취하여 <거연정(居然亭)>으로 편액하였다.

그러나 1708(숙종 34) 벽운정사가 소실되자 이듬해인 1709년 심원사(深源寺) 남쪽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였으니, 바로 영시암(永矢菴)이었다.

여기서 그는 실,,() 각기 연묵실,산입당,연백루(, 山立堂, 延白樓)라 이름하고 안이락지(安而樂之)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11(숙종 37)에는 갈역정사(葛驛精舍)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갈역에서의 정취는 이로부터 7년 후에 지어진 <갈역잡영(葛驛雜詠)>에 잘 드러나 있다.

곡구정사(谷口精舍) 1715(숙종 41) 가을 백부 김수증의 은거지였던 화음동의 입구에 건립한 정자로서 중용(中庸)의 문구에서 취하여 당실은 유구당,박후실(悠久堂, 博厚室), 누각은 고명루(高明樓)라 이름하였다.

이후 그는 명소를 두루 유람하다 백씨(맏형을 높여 이르는 말)김창집(金昌集)의 사망에따른 충격으로

1722 2 21일 조카 김언겸의 별장 가구당(可久堂)에서 고종하였다.

 

서울의 노론학계와 6

6창에 대한 입론(立論)없이 17-18세기 서울 노론학계의 학문학풍을 얘기할 수는 없다.

이는 동시대의 호서학계를 거론하면서 한수재,권상하(寒水齋,權尙夏)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그러면 6창 그들에게는 어떤 학문적 온축이 있었길래 한 시대를 풍미하는 학자로 성장히고,

나아가 서울학계의 종사(宗師)로 존중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6창 중에서도 농암(農巖)과 삼연(三淵)에 논의를 집중시켜 보도록 한다.

농암과 삼연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가학(家學)에 기반하였다.

이는 청음가문의 독특한 학문방식으로도 말해질 수 있다.

정유길(鄭惟吉)과 김극효(金克孝)의 경우도 사제관계이기보다는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이루어진 가학적 수수였다.

물론 선원과 청음은 이이성혼윤근수를 사사하였지만 그의 아들 광찬(光燦)과 손자 수증,수흥,수항(壽增壽興壽恒)는 가학 외에 특별한 사승관계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특히 김수항 형제는 송시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일생 정치적으로 동고동락하였지만 그의 문인은 아니었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농암과 삼연이 가학을 철저히 계승하였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나 가학을 고수하던 청음가문(淸陰家門)의 학풍에 새로운 변화가 수반된 것도 농암삼연 대였다. 농암은 15세 되던 1665(현종 6) 양주 영지동(靈芝洞)에 우거하던 정관재,이단상(靜觀齋,李端相)을 정식으로 사사(師事=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하게 된다.

이단상은 바로 그의 장인으로서 당시 기호학계의 학문적인 거장이었다.

안동김씨로서는 김극효 이래 4만에 혼맥과 학맥의 중복관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농암은 기본적으로 사위로서 장인을 사사한 경우였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단상은 월사 이정구의 손자였는데, 월사와 청음은「월정문하(月汀門下)」의 동문이었다.

이는 월사와 청음의 학문적 유대가 이단상과 김창협의 관계로 발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1667(현종 8)에는 삼연 역시 15세의 나이로 이단상의 문하에 입문하기에 이른다. 원래 삼연은 집안 사람 모주,김시보(茅洲,金時保)에게 수학하다 이 때에 와서 이단상을 사사하게 된 것이다.

이후 농암과 삼연은 형제요 동문으로서 학문 연마에 노력하는 한편 심신 수양을 위해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독서하였으며, 대부분 아우들을 동참시켜 학업을 독려하였다.

이단상 외에 농암삼연의 학문과 관련하여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은 송시열(宋時烈)과 조성기(趙聖期)였다.

농암은 1674(24) 용문산(龍門山)에서 송시열을 사사한 이후 왕래문답을 통해 사제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특히 1688(숙종 14)에는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화양동(華陽洞)으로 가서 송시열을 직접 찾아 뵙고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강토(講討)하기도 하였다.

당시 송시열은 노론 기호학파의 정치적 지도자이며 학문적인 구심점으로서 아버지 김수항과는 매우 각별한 관계였다.

따라서 농암이 그를 사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송시열 역시 농암의 학문을 신뢰하여 죽기 직전에는『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의 교정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는 농암을 자신의 고제적전으로 인정한다는 은미한 표시이기도 했다.

삼연은 농암에 비해 송시열과의 관계가 긴밀하지는 않았다.

28세와 31세 때 두 번 송시열을 만났을 뿐이며 문인으로 크게 부각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송시열보다는 졸수재,조성기(拙修齋,趙聖基)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하였다.

조성기는 임천조씨 출신으로 일생 처사로 살았지만 학식인 深博하고 풍류가 弘長한 한시대의 석학이었다. 한말의 역사가 김택영(金澤榮)이 그를 통수0(通儒)로 지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삼연이 조성기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중흥사(重興寺)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1676(숙종2) 무렵이었다. 당시 조성기는 남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하여 세상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삼연은 그를 직접 방문하여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1689(숙종 15) 조성기가 사망할 때까지 줄기차게 종유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암도 조성기와 종유하며 일정한 학문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농암과 삼연은 가학을 토대로 하면서도 이단상송시열조성기와 사우관계를 통해 당대 최고의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단상에게서는 학문하는 방향을 배웠고, 송시열에게서는 노론의 정치명분과 의리론을 수용하였으며, 조성기로부터는 경세론(經世論)[경제지학(經濟之學)]을 흡수했다고 할 수 있었다.

농암삼연이 서울학계의 구심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695년 무렵이었다.

이 시기 호서학계는 송시열의 고제 권상하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사실 농암은 1689(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賜死)되자 백운산의 농암(農巖)에 은거하여 세상과는 결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5년 후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일변하고 아버지가 신원됨으로서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정계에서도 그를 야인으로 두려하지 않아 이조참의부제학개성유수형조참판대사헌의 직첩이 계속하여 내려졌다.

그러나 농암은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근친(覲親)의 편의를 위해 백운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이 때 그가 임시로 거처를 정한 곳이 바로 미음(渼陰)이었다.

미음은 선대의 전장이 있던 곳으로 석실서원과는 지근한 거리에 있었다.

이에 농암은 미음과 석실서원을 자주 왕래하는 한편 석실서원에서 강학을 열어 본격적으로 후학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에 원근이 사자들이 운집하여 학문적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서서히 <농암문하(農巖門下)>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삼연은 석실의 송백당(松栢堂)에 거처하며 농암의 강석(講席)에 자주 참여하게 됨으로서 세상에서는 이들을 이정(二程)에 비겨 칭송하였다.

이 점에서 당시 농암과 삼연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려택(麗澤)>이요 <훈지(壎篪)>였으며 정현(鄭玄)의 고양리(高陽里)에 비길만한 미사(美事)였다.

농암과 삼연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의 의리론을 수용하면서도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서울 지역의 사회적 변화를 주시하는 성시산림(城市山林)의 경세론을 흡수함으로서 사상적 포용성을 지닐 수 있었다. 여기에 석실서원이라는 노론의 상징적인 서원이 학술의 도량으로 제공됨으로서 이들의 학풍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신속하게 확산될 수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농암삼연의 문하에는 서울 일대의 기환자제(綺紈子弟)들이 대거 입문하게 됨으로서 극성한 면모를 과시하게 된다.

이들의 문인들의 대부분은 노론계열이었으나 조문명과 같은 소론계열의 탕평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척기는 김창흡의 고제로서 영조조 노론(준론)의 영수로 부상하게 된다.

민형수는 당시 척신세력을 대표하던 여흥민씨 민진원의 아들이었으며,

조상경은 조엄의 아버지로서 19세기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었다.

19세기의 정치사를 움직인 3대가문이 안동김씨풍양조씨여흥민씨라고 할 때

이들 3가문은 농암삼연 당대에 이미 학맥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농암,삼연의 학통(農巖三淵의 學統)

李 珥 宋時烈 尹根壽 淸陰 -李端相 農巖 金昌輯 魚有鳳 李顯翼 金時保 金時佐 成 渾 仙源 趙聖期 李賀朝

이 이 송시열 윤근수 청음 -이단상 농암 김창집 어유봉 이현익 김시보 김시좌 성 혼 선원 조성기 이하조

李宜顯 洪錫輔 李命華 徐文若 徐宗集 權 燮 黃奎河 愼無逸 吳晉周 李 瑋 趙榮福 趙謙彬 李載亨 兪受基

이의현 홍석보 이명화 서문약 서종집 권 섭 황규하 신무일 오진주 이 위 조영복 조겸빈 이재형 유수기

趙尙絅 申靖夏 洪世泰 趙文命 宋逢源 黃載重 沈 檍 申命鼎 吳大廈 安相聖 兪纘基 金夢垕 元海翼 李 澐

조상경 신정하 홍세태 조문명 송봉원 황재중 심 억 신명정 오대하 안상성 유찬기 김몽후 원해익 이 운

洪鳳祚 李夏坤 李夢相 玄若昊 李弘命 趙翊臣 三淵 朴弼周 安重謙 安重觀 李秉淵 李秉成 宋堯佐 申命規

홍봉조 이하곤 이몽상 현약호 이홍명 조익신 삼연 박필주 안중겸 안중관 이병연 이병성 송요좌 신명규

洪有人 兪命岳 李喜之 金時敏 金時淨 金令行 趙命履 李剛中 張應斗 李德載 金明行 金純行 金春行 尹 潝

홍유인 유명악 이희지 김시민 김시정 김영행 조명리 이강중 장응두 이덕재 김명행 김순행 김춘행 윤 흡

兪拓基 鄭彦煥 兪肅基 閔亨洙 金羲瑞 朴泰觀 李夢彦 兪彦銓 金相復 高達明 趙德粹 金濟謙 鄭龍河 金用謙

유척기 정언환 유숙기 민형수 김희서 박태관 이몽언 유언전 김상복 고달명 조덕수 김제겸 정용하 김용겸

金彦謙 金信謙 金元行 金文行 鄭 敾

김언겸 김신겸 김원행 김문행 정 선

농암삼연의 문인들은 혈연학연이 중복된 경우가 많았다.

이하조(李賀朝)는 이단상의 아들로서 김창직(金昌直)의 사위였으며,

홍유인(洪有人)은 김수증의 외손이었다.

민형수(閔亨洙)는 김창집의 사위 민창수(閔昌洙)의 형이었고,

오진주,유수기((吳晉周兪受基) 농암의 사위였다.

이덕재(李德載)는 삼연의 사위이고, 유언전(兪彦銓)은 그의 손서였다.

그리고 조문명은 김창업의 사위였다.

이 외에도 문인들 중에는 안동김씨와 직간접적인 혼인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처럼 농암삼연이 서울지역의 명가의 자제들을 광범위하게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지니는 학문적인 깊이와 사상적 포용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여기에 청음의 증손이라는 사회적 지위가 가미되면서 이들은 보다 용이하게 서울학계의 구심점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일 농암삼연의 문인들은 학문적인 연대를 바탕으로 영조 연간에는 노론 준론의 핵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농암삼연의 학통은 농암의 손자 김원행에게 전수되어 이론적 토대를 강화하는 한편 호낙논쟁(湖洛論爭)의 과정에서는 낙론(洛論)의 실체로 등장하게 된다.


----------- 목      차 --------  

(1) 안동김씨  

(2) 문헌록  

(3) 씨족사 

(4) 안동김씨세보 

(5) 본관지 연혁 

(6) 오김의종통 

(7) 세계원류분파도 

(8) 先,後,안동김씨 

(9) 벌열 

(10) 조선조 급제자 정록 

(11) 등과,인명 

(12) 文化財및寶物 

(13) 서원향사(書院享祠) 

(14) 종묘배향 

(15) 선조문집 

(16) 유적 

(17)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18) 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