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역사안동김씨 역사(文化財및寶物)
안동김씨 역사(文化財및寶物)

文化財寶物

1)보물(寶物)
○태사묘유물(太師廟遺物),

보물제451,

고려시대 12 22,

안동시 북문동 24-1

누구의 유물인지 불분명함.(3 태사중)1542년 창건, 1958년 재건
붉은 잔, 무늬비단, 비단, (), 가죽신, 부채, 구리도장,

놋쇠함, 옥관자, 허리띠, 교지, 구리수저


2)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청원루(淸遠樓)(1520)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199
1, 정면7, 측면4

풍산읍 소산리 87
김번( 80: 15701652)선생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

1645년 청음(淸陰)공이 청()에서 풀려나서 누각(樓閣)을 중건(重建)하였다.

본래 2채의 건물로 41칸이었으나 1934년 홍수(洪水)때 유실되고 1채만 남았다.


○삼구정(三龜亭)
경북 유형문화재 제213
1(정면3, 측면2)  

소산리 76번지
입향조(入鄕祖) 전농정(典農正) 비안현감(比安縣監: 得雨)공의

현손(玄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영수(永銖: 14461502)

세 형님 영전(永銓: 監察), 영균(永勻:進士), 영추(永錘:水原府使)와 함께

88세 되는 노모(老母) 예천권씨(醴泉權氏)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1496년 건립,

1947년 중건하였다.
삼구(三龜)는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인 거북이를 말하는데 정자(亭子)

세 개의 돌이 거북 같다하여 삼구(三龜)로 이름하였음
정면3칸 측면2칸이며 모두 우물마루로 깔아 개방한 초익공양식의 오량가구(五樑架構)이다.


3)민속자료(民俗資料)
묵계서원(默溪書院

안동김씨묵계종택(安東金氏,默溪宗宅).
경북 민속자료 제19
31
길안 묵계 705번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 두 선생을 봉안(奉安), 1687(肅宗 13) 봉안(奉安),

1869(高宗 6)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

1988년 복원(復元). 강당(講堂), 읍청루(揖靑樓), 진덕문(進德門), 동재(東齋)가 있고

서원측면(書院側面)에는 보백당신도비(寶白堂神道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팔각기와와 지붕, 건물, 가운데칸은 마루, 좌우에 온돌을 들였음.

서원 좌측에는 정명 6, 측면 5칸의 구자형(口字型) 주사(廚舍)가 있다.
묵계서원과 같이 같은 날(1980, 6, 17)에 같은 문화재 번호로 제정된

안동김씨묵계종택의 정침(正寢)이 서원 묘우(廟宇)와 같이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안동김씨 종택(安東金氏 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
조선시대.
1.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18.
이 건물은 성종때의 명신(名臣) 영수(金永銖, 14461502)가 살던 집으로 안동김씨대의 종가댁이다.
목조와가 팔작지붕의 ‘口’자형집으로 내당의 정침(正寢)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3개의 고주(高柱)

높이 올렸으며 외당(外堂)은 오른쪽에 사랑채를 돌출시켜 배치하였다.

사랑채의 왼쪽에는 2칸의 방을 두고 오른쪽은 전체를 마루로 꾸며 제례시 제청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김영수공은 자()가 적옹(積翁),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양소당이란 장령공 11대손 양근(養根,文科,刑議)이 지은 당호이며 현댁은 어조판서 학순(學淳)이 썼다.


○안동김씨 북애종택(安東金氏 北厓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7.
조선시대.
2.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358.
이 건물은 안동김씨 북애 김후(北厓金 82)공의 종택으로 민도리 홑처마 팔작지붕 ‘口’자형 집이다.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음에는 노씨 문중(盧氏 門中)의 종택으로 창건되었다.

그후 그의 외손인 황씨(黃氏)가 입주했으나 자손이 없자 또 그의 외손인 아주신씨(鴉洲申氏)에게

인계 입주시켰으나 이들 역시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외손인 북애공이 약 370년 전에 인수, 여기서 세거(世居)하였다고 한다.

매죽헌(梅竹軒)이란 헌호가 걸려있다.


○묵재고택( 44齋古宅)
경북 민속자료 제85
조선(1516)
2
풍산읍 소산리 221
현 소유자 김승진(金昇鎭)의 선조들이 세거(世居)한 집이다. 그러나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랑채 암막새와 기와내림 새면에 조각된 정덕(正德 11: 1516: 中宗 11)

기록으로 정침(正寢)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몸체의 평면이 고식(古式)에 많은 H자형(字型)

이루었고 사랑방 뒷쪽에 있는 도장방의 배치(配置), 행랑채의 구성(構成) 등으로 보아

소산리(素山里)에서 몸체에 사랑부분이 포함된 주택중(住宅中)에서는 가장오래 되었음을 알수있다.
안대청 상부의 조각(草刻)한 부재(部材)로 이루어진 대공과 X자형(字型) 받침대 위에

십자형(十字型)을 짜서 올린 부엌상부의 대공은 주택건축(住宅建築)에 보기 드문 수법이다.

 

○안동김씨 태장재사(安東金氏 台庄齋舍)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6.
조선시대(1793).
3.
안동시 서후면 태장1 249.
이 건물은 안동김씨 시조인 태사 김선평(金宣平)공의 묘단(墓壇)를 지키고 봉제(奉祭)를 위한 재사이다.

재사 가까운 지역에는 신라시대부터 천태암(天台庵)이 있었다 한다.

제단을 설치한 이후 묘단(墓壇) 동쪽 100보 내에 숙종(肅宗) 37년 경 소옥(小屋)을 지었다가

영조 25(1749) 재사를 확장하였으나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양근(養根)공이

경향각처의 뜻을 모아 현 위치에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터를 닦아 정조(正祖) 17(1793) 28칸을 중건하고

익실(翼室)과 문루(門樓)를 옮겨지었다.

1913년 주사를 현위치에 확장하여 10칸을 중건했고 1960년 풍수해를 당해 재사를 보수했다.
‘口’자형의 재사와 ‘一’자형의 이상루(履霜樓), ‘ㄷ’자형의 관리사(管理舍)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사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有司室)과 전사청(典祀廳), 그리고 참제원실(參祭員室)이 있다.

이상루는 묘제 후에 음복과 문중 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재사는 민도리 집의 간결, 검소한

건물이며 누는 이익공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 상부는 3면에 판벽(板璧)을 치고 판문(板門)을 설치하였다.
이 지역 재사건물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물로 매년

음력 10 10일에 묘제를 지낸다.


4)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만휴정(晩休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
조선시대.
1.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1081.
본 건물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의 정자로서 16세기 초에 건립하였다.

공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던 분으로 안동 소산(素山)의 남불정 마을에서 태어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당대의 인물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교유했다.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한 공은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堤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폭정을 만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땅으로 낙향했다.

그후 설못(현 소산 2)가에 조그마한 정자[보백당]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으나

길가인 관계로 한적한 맛이 적자 더욱 조용한 장소를 찾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얻어진 것이 오늘 날의

만휴정(晩休亭)이다.


○안동 소산리 동야고택(安東 素山里 東 83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3.(1987.12.20)
조선시대.
1.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12.
이 집은 안동김씨(安東金氏) 19대 손인 김중안(金重安)이 지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동야 김양근( 83金養根, 17341799)이 이 집에서 태어나 수학(修學)하였다고 하는데,

공은 영조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어전의 면시(面試)에서 답안(答案)에 공자가어(孔子家語)

“노인동야필사(魯人東 83畢事)”를 인용하였던바 임금이 ‘동야선달은 어디 있나’라 부르면서 시권(試券)

외우라고 명한 것을 기념하고자 호()를 동야라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 집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집은 앞마당에 이단(二段)의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서있는 일자형 사랑채와 뒤에

‘口’자형으로 앉아 있는 안채가 튼 ‘口’자형 배치를 하고 있는데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이 남아 있고,

큰사랑방이있는사랑채도소박한형태를간직하고있다.


○비안공 구택(比安公 舊宅 敦素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1.(1989.05.29)
조선시대.
2.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24-3.
이 집은 조선 세종 때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비안공(比安公) 삼근(三近, 14191465)의 옛 집이다.

공은 군내 풍산현 남불정촌(南佛頂村)에 살았으나 둘째 아들 계행(係行, 14301517)이 출생한 이후에

이곳 소산리로 옮겨와서 살았으므로 이 무렵에 이 집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집에서 출생한 삼근(三近)의 장손(長孫)인 학조(學祖)는 세조 때의 고승(高僧)으로 대장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계와 문화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비안공의 둘째 손자인 영전(永銓, 14391522)도 이 집에서 태어났으며 성종 때에 보익의 공훈으로

공신녹권(功臣錄券)이 하사되었고 합천부사·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이 건물 정면에는 돈소당(敦素堂)이란 현판도 걸려있는데 이는 영전공의 9대손 언행(彦行)의 호를 따라서

부르던 집 이름이다.


5)기념물(紀念物)
태사묘(太師廟)
경북 기념물 제15
북문동 24-1
삼공신(三功臣) 위패봉안(位牌奉安), 1481(成宗 12) 김자행(金自行)이 목면과 베를 주어 입보(立寶)하면서

묘우건축(廟宇建築)의 터전을 잡았고, 1540(中宗 35) 안동부사(安東府使) 김광철(金光轍)이 건립(建立)하고,

제전설치(祭田設置)를 하였다, 1556년 부사 권소(權紹)가 제전(祭田)과 곡물(穀物)을 증가(增加)하였다,

부속건물(附屬建物)로는 보물각(寶物閣), 숭모당, 동서재, 경모루, 안묘당 차전각 등이 있다.


6) 김상용 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99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덕소리
문충공 상용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선조 23(1590)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 도승지 대사헌 호조판서를 지낸다. 인조 10(1632)우의정을 지낸다.

인조14(1636)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을 시종하여 강화에 피난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함


7)김상헌 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100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문정공 상헌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선조 29(1596) 정시문과와 광해군 즉위년(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정언,직제학 대사간 예조.

현조판서를 지냈고 척화진으로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풀어난 후 좌의정 영돈영부사를 지냈다.


----------- 목      차 --------  

(1) 안동김씨  

(2) 문헌록  

(3) 씨족사 

(4) 안동김씨세보 

(5) 본관지 연혁 

(6) 오김의종통 

(7) 세계원류분파도 

(8) 先,後,안동김씨 

(9) 벌열 

(10) 조선조 급제자 정록 

(11) 등과,인명 

(12) 文化財및寶物 

(13) 서원향사(書院享祠) 

(14) 종묘배향 

(15) 선조문집 

(16) 유적 

(17)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18) 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