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역사안동김씨 역사(세계원류분파도)
안동김씨 역사(세계원류분파도)













파명록

     갑자보(甲子譜)’를 보면

 8김혁(金革) 이래로 경북 안동군(安東郡) 일원을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고 있으나,

     관향(貫鄕)인 안동(安東)에 터를 잡고 세거하게 된 것은 그 이전부터라고 믿어진다.
11
세 김영전(金永銓)의 자손들은 김영전(金永銓)의 조부(祖父) 김삼근(金三近)

     대 이래로 안동(安東)의 소산(素山)에서 살면서 의성(義城)ㆍ예천(醴泉)ㆍ영풍(榮豊)

     봉화(奉化)ㆍ영덕(盈德) 등 경북 일원에 나뉘어 터를 잡았던 것 같다.
    
김영전(金永銓)의 동생 김영윤(金永勻)의 자손들은 김영윤(金永勻)

     둘째 아들 김환()의 후계(後系)가 의성(義城)에서 살았고,

16세 김치문(金致文)의 후계(後系)는 상주(尙州)에 살았으며,

     그밖에

22김유순(金儒淳) 이래로 일부가 울진(蔚珍),

23김수근(金秀根) 이래로 선산(善山)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영추(金永錘)의 자손들은 예천(醴泉)과 의성(義城)에 많이 살았다.
11
김영수(金永銖)의 자손들 중에서

12김영(金瑛)의 후계는

15세 김양(金樑)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기도 파주(坡州)ㆍ교하(交河)에 살게되었고

17김중현(金重鉉)의 대 이후에 전북 정읍(井邑)ㆍ순창(淳昌)

     담양(潭陽)ㆍ고창(高敞) 등지로 산거해갔다.
    
또한

12세 김번()의 후계(後系)는 대체로

15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대부터 3대에 걸쳐

     경기도 양주(楊州)ㆍ여주(驪州)ㆍ포천(抱川) 등지와

     충북 괴산(槐山), 충남 홍성(洪城)ㆍ논산(論山)ㆍ은진(恩津)ㆍ공주(公州)ㆍ서천(舒川)

     아산(牙山)과 천원(天原)의 목천(木川) 등지, 전북 옥구(沃溝)ㆍ정읍(井邑)에 나뉘어

     정착했으며 김번()의 동생 김순(金珣)의 후계(後系)

18세 김필광(金必光)의 대에 일부가 안동(安東)에서 칠곡(漆谷)을 거쳐 창녕(昌寧)

     영산(靈山)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하여

17세 이후에 영덕(盈德)의 영해(寧海)ㆍ밀양(密陽)ㆍ영양(英陽)ㆍ봉화(奉化)에 살았다.
11
세 김극인(金克仁)의 자손들은

19김정환(金鼎煥) 이래로 일부가 전북 무주(茂朱),

14세 김응순(金應順) 이래로 경북 성주(星州), 자리잡았고,

     그밖에 안동(安東)을 비롯하여영덕(盈德)ㆍ의성(義城)ㆍ칠곡(漆谷)ㆍ청도(淸道)

     등지에도 살았던 것 같다.
    
김극인(金克仁)의 동생인 김극의(金克義)와 김극례(金克禮)의 자손들은 주로

     안동(安東)과 봉화(奉化)에 세거하였으며 그 중

17김광렬(金光烈)의 후계(後系)가 강원도 춘천(春川),

15세 김근청(金謹淸)의 후계(後系)는 김근청(金謹淸)이 해주(海州)로 옮겨간 이후

     해주(海州)부근에서살았다.

     김극지(金克智)와 김극신(金克信)의자손들은의성(義城)에 세거의 터를 정하였다.

     한편

 9세 김삼익(金三益)의 후계(後系)는 안동(安東)ㆍ예천(醴泉) 등지와

14세 김언기(金彦紀) 이래로 함안(咸安) 등지에 산거하였고,

     김삼우(金三友)의 후계(後系)는 선대(先代)부터 세거해온 안동(安東)

16세 김엽(金燁) 이래로 문경(聞慶),

18세 김업(金業) 이래로 삼척(三陟),

18김창기(金昌起) 이래로 창녕(昌寧),

15김현() 이래로 예천(醴泉) 등지에 옮겨가 자리잡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9세 김근신(金謹信)김진()의 자손들은 안동(安東)에 많이 살았고

     일부만

20세 의 대를 전후하여 영양(英陽)의 진보(眞寶) 등지와 영덕(盈德)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또한

 9세를 김화(金華)김경주(金敬珠)의 후계(後系)가 안동(安東)의 예안(禮安)

     봉화(奉化)의 춘양(春陽)에 세장지지(世葬之地)를두고 있으므로

     이들지역에 오래 세거한 것같다.

 8세 김정(金鼎)의 자손들은 김정(金鼎) 이래로 충북청주(淸州)를 세거의터로삼아왔으며,

 6세 김학(金鶴)의 자손들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토산(兎山)에서 살다가

13세 김형(金衡)의 대를 전후하여 일부가 강원도 이천(伊川)에 이거한 것 같고

12세 김치(金峙)의 후계(後系)가 안성(安城)을 거쳐 충북 음성(陰城)

     경기도 양주(楊州)에 나뉘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20김덕남(金德南)의 대부터 전남 고흥(高興)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으며,

     김복형(金復亨) 이래로 강원도 강릉(江陵),

15세 김응필(金應弼) 이래로 경북 경산(慶山)의 자인(慈仁)에 살게 되었던 것이

     임술보(壬戌譜)에 보인다.
    
황해도 토산(兎山)에 살았던 자손들은 이후에 해주(海州)ㆍ황주(黃州)ㆍ송화(松禾)

     수안(遂安) 등지로 산거해왔으며

21김천수(金千壽)의 후계(後系)는 평남 성천(成川)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1930년경,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중면(中面) 화성군(華城郡) 정남면(正南面) 동탄면(東灘面),

        김포군(金浦郡대곶면(大串面)

        강화군(江華郡길상면(吉祥面하점면(河岾面),

강원도: 명주군(溟州郡강동면(江東面)

충북  : 청원군(淸原郡괴산군(槐山郡) 음성군(陰城郡) 일원

충남  : 연기군(燕岐郡논산군(論山郡) 상월면(上月面),

        부여군(扶餘郡부여읍(扶餘邑)  천원군(天原郡) 일원,

전북  : 순창군(淳昌郡풍산면(豊山面)  고창군(高敞郡) 공음면(孔音面),

전남  : 고흥군(高興郡도양읍(道陽邑)

경북  : 달성군(達成郡성서면(城西面)  의성(義城) 안동(安東) 청송(靑松)

        영양군(英陽郡예천군(醴泉郡봉화군(奉化郡),일원

경남  : 함안군(咸安郡칠서면(漆西面)  함양군(咸陽郡) 안의면(安義面)  창녕군(昌寧郡

황해도: 수안군(遂安郡대성면(大成面)

평북  : 귀성군(龜城郡박천군(博川郡)  용천군(龍川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족보발행년보

관향(貫鄕)을 같이하는 씨족(氏族)의 상계(上系)를 수록한 책을 족보(族譜)라 하고,

  각파()의 세계(世系)를 한데모아 그 순서(順序)와 계통(系統)을 정하여

  합보(合譜)한 보첩(譜牒)을 대동보(大同譜)라고 한다.

  족보는 조상의 역사이며 인류의 생활 기록으로서 돈종목족(敦宗睦族)

숭조함양(崇祖涵養)을 최고의 가치(價値)로 여긴다.

  족보는 중국 한()나라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1476년 성종(成宗)안동권(安東權)의 성화보를 최초의 문헌(文獻)이라고 한다.

 

1. 초보(初譜)

오김(吾金)의 족보(族譜)

17세손 문곡(文谷) 수항(壽恒)께서 처음 시작하였다.

그는 일찍 족보에 뜻을 두고 손수 초고(草藁)를 만드시다가 마무리 하지 못하고

상자에 넣어 두었는데,

그 때가 1659(己亥, 孝宗10)이었다.

30년이 지난 후, 아들 삼연(三淵) 창흡(昌翕)께서는 결략(缺略)을 보완하던중

1689(己巳, 肅宗15)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당하여 부친이 사사(賜死)되자 이를

다시 상자에 넣어 30년을 보관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초간보(初刊譜)이다.

 

2. 1간 기해보(己亥譜, 1719 肅宗45)

초간보(初刊譜)를 토대로 삼연께서 서문(序文)인 족보서(族譜序),

죽취공(竹醉公) 제겸(濟謙)께서 발문(跋文)

기해구간서족보후(己亥舊刊序族譜後)를 지어 보책(譜冊)을 인쇄하려고 하던 중,

1721(辛丑, 景宗1)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만난 그 이듬해 몽와(夢窩) 창집

(昌集)께서 유배되자, 삼연선생마저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시니,

또 중단하고 말았다.

4년뒤(1725년 乙巳, 英祖1), 교교재공(嘐嘐齋公) 용겸(用謙)선생에 의하여 다시

2년간을 수보(修譜)한 후 1727(丁未, 英祖3)에 비로소 보책(譜冊)이 인쇄되었다.

그 때 삼연께서 지으신 서문(序文)은 친필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대동보에

수록된 족보서(族譜序)는 노천(櫓泉) 신겸(信謙)께서 추서(追書)하였다.

기해보는 공수부정부군(公須副正府君) 1세로 하여 22세에 이르렀고,

10세에 와서 6()가 되니, 보책(譜冊) 4권이었다.

 

3. 2간 경술보(庚戌譜, 1790 正祖14)

교교재공(嘐嘐齋公)께서 범례(凡例)를 초정(草定)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함에 따라 익헌공(翼憲公) 이소(履素)께서 계술(繼述) 책임을 지고

평안감사(平安監司)로 나가 봉전(俸錢) 십만량을 내어 출판비로 쓰니,

중수(重修)한 지 1년도 안되어 편찬을 마무리 하였다.

발문(跋文)은 이안(履安)께서 썼다.

경술보의 특징은 자녀행(子女行)을 선남후녀(先男後女)로 고치고 생졸모년

(生卒某年)위에 황명년호(皇明年號)를 쓰며, 숭정 갑신후(崇禎甲申後)

아조(我朝)의 모종모년(某宗某年)이라 섰으며,

보책은 기해보의 배인 8권으로 늘어났다.

 

4. 3간 계사보(癸巳譜, 1833 純祖33)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 우의정 달순(達淳)께서 경비를 의연(義捐)

하는 한편,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께서 내탕전(內帑錢)

천민(千緡)을 하사함에 따라 곧 일을 시작하려고 하던 중 이공(二公)의 갑작스런

별세로 그 이듬해 편찬하였으며,

발문(跋文)은 판서(判書) 이양(履陽)께서 썼다.

계사보는 몰(歿)을 졸(), ()를 실(), ()에도 월일을 첨록(添綠)

하는 등 귀천(貴賤)을 없게하였다.

 

5. 4간 무인보(戊寅譜, 1878 高宗15)

충순공(忠純公) 문근(汶根)께서 선지(先志)의 뜻을 두었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문헌공(文獻公) 병학(炳學),

충문공(忠文公) 병국(炳國)께서 여러 종족들과

입의출재(立議出財)로 도우며,

철종(哲宗)의 비() 대비전하(大妃殿下)

천민(千緡)을 하사하시니,

소산(小山) 병주(炳柱), 만제(晩濟) 세균(世均)께서

주관하여 편찬하였으며,

발문은 영초(潁樵) 병학(炳學)께서 썼다.

무인보는 원세선영도(遠世先塋圖) 및 원류분파도는 권수(卷首)에 싣고,

생존배우(生存配偶)는 사조(四祖)까지 기록하였다.

 

6. 5간 병인보(丙寅譜, 1926)

발문은 종한(宗漢)께서 썼다.

병인보는 종통(宗統)을 승속(承續)함은 반드시 적장(嫡長)으로 하나,

차파(次派)로 승통할시 그 사유(事由)를 기록토록 하였으며,

서자(庶子)를 삭제하고 그 소생모(所生母)는 실()이라 하며,

또한 종통의 승속은 적소서장(嫡少庶長)이라도 반드시 선적후서(先嫡後庶)하여

가법(家法)을 세웠으며,

나아가 별보(別譜)의 별자(別字)를 삭제하였다.

 

7. 6간 기해보(己亥譜, 1959)

6.25동란후 용진(容鎭), 희진(憙鎭), 홍한(洪漢), 의동(宜東), 성진(晟鎭)께서

주관하여 편찬하였으며,

발문은 용진(容鎭)께서 썼다.

기해보는 여란(女欄)은 서(婿)를 주로 한 구보(舊譜)를 탈피하여 남자와 동등하게

기록하였으며 현대식 양장본(洋裝本)으로 혁신을 기하였다.

권수는 한 질 9권으로 되어있다.

 

8. 7간 임술보(壬戌譜, 1982)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 진동(震東), 의동(儀東)께서 주관하였으며,

1 13권을 편찬하였고, 발문은 두현(斗顯)께서 썼다.

임술보는 생존자의 서기년도와 간지(干支)를 넣고,

세계원류분파도는 20세기로 확대하며, 원문(原文)과 번역문을 동시에 붙이고,

발문은 수편(首編)에 편집하였다.

 

9. 9간 갑자보(甲子譜, 1984)

  대종회(大宗會) 성진(晟鎭)께서 주관하여 1 12권을 간행하였고,

  발문은 성진(晟鎭)께서 썼다.

  갑자보는 번역문을 병기(倂記)하고,

  서기년도와 간지(干支)를 기록하며,

  수편(首編)만을 한 권으로 독립시켰다.

 

 9간은 두 갈래가 아닌 통합 대동보 편찬이 이룩되어 진정한 족보가

 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경북 안동시 대석동   (重東 제공

◇교육행정직 40년간 근무 


----------- 목      차 --------  

(1) 안동김씨  

(2) 문헌록  

(3) 씨족사 

(4) 안동김씨세보 

(5) 본관지 연혁 

(6) 오김의종통 

(7) 세계원류분파도 

(8) 先,後,안동김씨 

(9) 벌열 

(10) 조선조 급제자 정록 

(11) 등과,인명 

(12) 文化財및寶物 

(13) 서원향사(書院享祠) 

(14) 종묘배향 

(15) 선조문집 

(16) 유적 

(17)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18) 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