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역사안동김씨 역사(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안동김씨 역사(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오늘 우리가 대종중이란 이름을 내걸고 자리에 모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기의 가까운 조상으로 따지면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조금만 길고 넓은 안목으로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모두 조상의 자손이요 식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까닭은 또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전통을 공유하는 이른바 문화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김문의 문화의 핵심 그리고 문화의 정체를 찾아보려는 것이 오늘 강연의 목적이고

그것을 청백에서 찾아보는 것이 주제이다.

문정공 청음선생은 <고려조에 세운 공은 이미 역사에 실려 있는 휘황찬란함에 있어서 우리 시조께서 으뜸이요

장씨와 권씨는 그에 비견할 바가 된다.
여기에 덧붙여 또한 뛰어난 일이 있으니 우리 김문은 청백의 전통을 팔백년이나 이어오는 일이다.

(麗代論功在史編煌煌吾祖冠張權一皆無礪還餘事淸白傳家八百年)>라고 읊었다.

(려대논공재사편황황오조관장권일개무려환여사청백전가팔백년)

그는 김문의 전통을 특히 <淸白傳家八百年>(청백가전팔백년)이라 하며 자랑스러워 하였다.
청백이란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오직 청렴결백하게 일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청백리 집안은 청빈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게 추구하지 않는 자세이며

특히 의롭지 아니한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거부하는 것이며 의롭지 아니한 방법으로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취하는

것을 경계함을 의미한다.

대개 권력과 재물을 취하는 데에는 의롭지 아니한 것이 많고 또한 의롭지 아니한 방법이 개입되기가 쉽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결국 청백은 정정당당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청백은 주자가 강조하였고 중국인의 가정에도 쓰는 구절이다.
그러나 청백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흔한 일도 아니다. 그만큼 실천은 어렵다.
시조 태사공은 고을의 우두머리로서 위로는 국가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이끌며 안동을 충절의 고장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분의 청백은 사사로운 감정과 욕심을 넘어서 공익과 공공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철학으로서의 청백이었다.
그때 확립된 문화전통이 천년을 내려오면서 안동을 충절의 고장이 되게 것이다.
그렇하기 때문에 청음의 시대에는 청백팔백년이라 하였지만 순조조에 와서는 세간에서는

안동김문을 천년세족(千年世族)이라 칭하였다.
청백의 정신은 세조조에 와서 보백당이라고 부르는 정헌공(김계행) 의하여 전형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사성을 지낸 분의 청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특히 당시 국왕의 총애와 존경을 받으며 국사의 자리에 있었던 조카인 학조대사를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사마시에 합격한 보백당은 성주향교의 교수라는 한직에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학조대사가 숙부를 뵙고자 성주목에 들렀다.

목사는 대사께서 움직이실 없다하고는 사람을 시켜서 보백당 더러 관아로 오라고 전갈을 하였다.
보백당이 거절하자 학조대사는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향교로 숙부를 찾아뵙고 사죄를 청하였다.
그리고 존경하는 숙부께서 한직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숙부에게 어떤 자리를 국왕에게 천거를 할까하고 여쭈었다.
숙부는 대답 대신에 조카인 학조대사를 바지를 걷어 올리게 다음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때렸다.
너는 가지 죄를 범했다.

하나는 조카가 되어 숙부를 오라고 것이 죄요
둘째는 중이 주제에 공무를 담당하는 관아에 들어가 관폐를 끼친 것이 죄이며
번째로는 권력으로써 관직을 농락하려 했으니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로 보백당의 엄격함과 높은 도덕적 자세를 칭송하지만 우리는 학조대사의 태도 역시 눈여겨

보아야 한다. 국가의 자리에 있는 고승인 조카를 때리는 보백당이나 숙부의 가르침을 깊이 뉘우치며 벌을 받는 학조

역시 비범한 인물인 것이다. 보백당은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쳐서 대사성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을 간하다 파직되어 소산 향리로 돌아와 집에 보백당이라는 당호를 써서 걸어 놓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말씀인 <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은 오직 청백이니라(吾家無寶物寶物唯淸白.오가무보물보물유청백)>하였다.
말년에 묵계로 터를 옮겨 거기서 운명을 하였는데 임종 시에 소산에 있던 종손자인 삼당공(김영) 불러서 유계로서

<가전청백 세수공근 효우동목(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 당부하였다.
참고로 보백당을 향사하는 묵계서원에는 응계(옥고) 함께 모셨는데 이유는 그가 세종조의 유일한 청백리였기 때문이다.
만큼 보백당의 후손과 안동 유림에서는 청백을 중시하였다.
보백당이 남긴 청백의 철학은 종손자인 삼당에 의하여 전해졌다.
삼당은 조부인 판관공(김계권) 따라 아우인 서윤공(김번)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
오늘날 경복궁 서쪽 담을 동네 일대를 장의동이라 하였는데 이를 대대로 터를 삼았기 때문에 흔히 이들 형제의 후예를

장동파라고 부른다.
삼당은 중종17(1522) 인왕산의 청풍계곡에 조촐한 초가 정자를 짓고,

태고정(上天之理太古之道.漢書/ 西山靜似太古. 唐子상천지리태고지도,한서,서산정사태고,당자)이라 이름하고

주위에는 개의 작은 연못을 파고 각각

척금(滌襟: 옷깃 가슴/마음을 씻다), 조심(照心:마음을 비추어 보다), 함벽(涵碧:푸르름을 담그다)이라 이름짓고

이를 즐겼으니 내면의 세계를 짐작할 있다.
삼당이라 자호한 것도 연못을 이름이다.
관직과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그윽하고 맑은 자연과 준일한 선비들을 벗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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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나 위인 농암 이현보와는 사마시 동방급제를 하였는데 연고로 당대 영남 8대문장가로 칭송받으면서 함께 놀았다.
그의 손자 창균(김기보) 조모를 모시고 소산으로 돌아와서 퇴계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청송(권호문) 교유하며

영남8대문장가로서 이름을 높였는데 소산을 안동김문의 중심기지로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고정과 청풍계는 선원이 물려받아 가꾸었고 안동김씨 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들에게 청백의 의미를 감상하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공간으로 존재해 왔다.
우암이 대명일월(大明日月) 주희의 말씀인 백세청풍(百世淸風) 청풍대 바위에 각자되어 있었는데,

대명일월은 일제시에 훼손되었고 백세청풍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정주영씨 저택의 터가 되었다.
삼당의 막내 아우 진사 김순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조정랑과 경상도사를 지냈는데 명종 6년에 편찬한 <국조보감>

염근한 인물로 초계된 주세붕, 이준경, 이황 33 중에 13번째로 거론된 인물이다.
지금 병산서원 가는 길목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벽 위에 어락정을 짓고 노니는 것을 즐겼다.
역시 종조부 보백당의 유훈을 받들어 자식들에게도 청백의 선비전통을 지키도록 교육하였다.
차남 눌재(김생명) 마곡서원에 봉향되었고 손자 학산(김인상) 임진왜란 의병을 일으켰으나 사로잡혀 얼굴 가죽을

벗기는 차마 묘사하기 어려운 참혹한 고문으로 죽는 순간까지도 의연하게 왜장을 꾸짖었다.
삼당공의 종증손 서윤공의 증손자인 청음(김상헌) 청백의 정신을 역사에 가장 뚜렷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서윤공의 셋째 손자 극효는 상용 상헌 상관 상복 등의 자식을 두었는데 청백의 기풍으로 훈육을 하였다.
후에 청음은 백부인 김대효에게 입양되었다.
형인 선원(김상용) 온후하고 다른 의견들을 조정하고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는 행정가로서의 소질이 강한 반면

청음은 강직하고 시비가 분명한 학자적 성격이 강하였던 같다.
청음은 한결같은 곧은 자세로 유명하였다.
집안에서 부친과 형들이 농담을 하다가도 청음이 집안에 들어오면 모두들 자세를 고쳐 앉았다고 한다.

그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영의정인 추탄 오윤겸은 청음이 대사헌이 되었다면 누구도 탄핵에서

예외가 없을 것이라며 기대를 표하였고, 왕족은 화려하게 지었던 정자의 원기둥을 당장에 도끼로 모나게 깎았다.
그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옳지 않은 언행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질정을 요구하였고 자세와 입장이 한결같았으므로

임금 조차 청음이 무슨 말을 하는가에 신경을 정도였다.
청음은 서인에 속했지만 광해군의 북인정권 하에서 북인이 남인 학자 회재(이언적) 퇴계(이황) 문묘에서 삭제하려는

회퇴변척(晦退辨斥) 주도하자 이에 대항하여 과감히 부당성을 강변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또한 인목대비를 폐모서인하려는 광해군의 획책을 저지하다가 인목대비의 오빠인 김제남에게 역적모의의 음모가 덮어 씌어지자 그와 사돈관계에 있었던 청음은 삭탈관작을 당하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지냈다.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었다.
형인 선원이 반정공신이었지만 청음은 논공행상으로 권력 나누어 먹기를 경계하고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할 ,

그리고 비록 폐주라도 국왕을 지낸 분이므로 예로써 대우를 것을 주장함으로써 젊은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

청론(淸論) 지도자가 되었다.

청음은 인조 14(1636) 청백리로 선발되었다.
12월에 청나라가 침입하였으니 병자호란이다.
척화파의 지도자로서 청음의 행적은 너무나 유명하므로 자리에서 새삼 거론하지 않겠다.
그는 소산으로 내려와서 청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증조부의 구택을 청원루라 이름지어 지내다가 다시 학가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먹으며 불의에 항거하여 지냈던 고사를 따서 동네를 서미동으로 부르고 자신의 거처를 목석거라

이름하고 지냈다.
청음이 청나라로 끌려가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맞선 이야기 역시 새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청의 관리들 조차 그의 정직불굴(正直不屈) 기개와 정정당당한 자세를 우러러 망가(望哥) 불렀다.

우러러 만한 어른이라는 뜻이다.
청태종은 그의 절의(節義) 감동하여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나에게도 저런 신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경탄을 하면서. 청음이 마침내 돌아왔을 백성들은 국가의 지주로서 여겼다. 임금은 그에게 좌의정을 내렸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나라를 오랑캐에게 내어준 죄인이며 수년을 감옥살이 하는 데에 보냈으니 국정의 경험이 없으니 벼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일년의 봉록을 보냈으나 그는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일을 하지 않았으니 받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석실에서 영면하여 형인 선원이 묻힌 석실에 묻혔다. 물론 청음은 가난하지는 않았다.

조모가 경명군 이침의 손녀로서 왕족이었기 때문에 재산이 있었다. 그러나 청음은 재산에서 푼을 늘리지 않았다.
청음이 인조 23 청에서 풀려나 귀국할 평양에 도착하여 편지
청음이라는 호는 자호인지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청음은 대나무와 관계가 있다.
백거이가 <대나무를 기르며>라는 시에 대나무는 곧고 둥글고 비어있고 마디가 있고 푸르다는 점이 군자로서 지녀야

덕목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대나무는 맑은 공기와 맑은 토양과 맑은 물에 의하여 자란다.
대나무가 자라면 해가 비치는 한낮에는 맑고 서늘한 그늘 청음(淸陰) 주고 바람이 불면 맑은 소리 청성(淸聲)

낸다는 것이다.
문정공 청음은 대나무처럼 곧고 마디 마디가 분명하였으며 백성과 선비들에게는 맑고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었다.
우암(송시열) 청음에게서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제자로 자칭하면서 청음을 그가 추구하는 대의의 화신으로 존경하였다.
청음의 손자 문곡(김수항) 우암은 숙종조 서인의 영수였으며 숙종 15(1689) 장희빈을 지지하는 남인이 일으킨 기사환국에서 유배당하고 이듬해 사사되었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자식들에게 벼슬길에 나가지 것과 나가더라도 청요직에만 나가라는 훈계를 남겼다.

자식들은 절의의 전통을 고수하며 관료로 나아가는 것을 거절하고 학자로서의 의연함을 지켰다.
갑술환국으로 문곡이 신원복작되었으나 숙종의 출사권고를 그들은 확고하게 거절하였다.
농암(김창협) 학문의 도량이 크고 수준이 높아서 일찍부터 노론은 물론 소론과 심지어 남인조차 자기편에 영입하여 지도자로 키우려는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다.
숙종이 그에게 연달아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제수하였으나 1708 졸할 때까지 끝내 사양하였다.
그가 호조참판직을 사양하며 왕에게 올린 상소문은 려한십가문장(麗韓十家文章) 실릴 만큼 천하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삼연 김창흡 역시 학자로서 일생을 견지하였다.
장남 몽와(김창집) 결국조상의 사당에 고하고 봉공하라 국왕의 엄중한 명을 받고서야 관직에 나아가서 마침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영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목호룡과 김일경 소론에 의하여 참혹한 죽임을 당했고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자리를 파서 못을 만드는 ) 벌과 함께 이름에는 역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극형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김제겸과 손자 김성행까지도 죽임을 당하고 가솔들은 모두 일곱 군으로 나누어 유배되었으니

안동김문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련이었다.

참화가 4대에 걸쳐 벌어진 것은 역사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자손들은 억울하고 참혹한 환란을 꿋꿋하게 견디었고 곧은 자세를 견지하였다.
노가재(김창업) 동몽교관의 직과 국왕의 경연에 나가기를 거절하고 일생을 문학과 예술로써 초야에 묻혀 지냈다.
제겸의 차남인 미호(김원행) 농암의 손자로 출계하였으므로 참화를 면했다.
그는 석실서원에서 당대 노론의 최고학자로서 지내며 홍대용과 같은 실학파를 길러내면서 국왕과 타협을 하지 않고

일생 동안 번도 서울에 발길을 들여놓지 않았다.
김문의 자손들은 영조의 어정쩡한 완평책에 맞서서 끝까지 조상의 완전한 신원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세상에 나타났다.
영조는 김수항-김창집-김제겸-김성행에 걸친 4 조손에게 부조(不祧) 내리고 일묘사충(一廟四忠) 편액을 내렸으니

4대에 걸쳐 국불천이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일이다.
그들은 정조 모든 사람들이 홍국영의 충천하는 세도에 굴할 때에도 오히려 그를 경멸하였다.
준평책을 추구한 정조는 이들 김문이야말로 대절이 있고 절의와 문장과 학문과 도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실공히

국가 최고의 가문이라고 극찬하고 마침내 사사로운 권력욕에 사로잡힌 귀족벌열들 틈에서 왕권을 끝까지 지켜주는 신뢰할

유일한 집안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풍고(김조순) 따님을 세자빈으로 직접 책봉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으니 안동김문이 생명처럼 지켜온 청백의 전통이

낳은 결과였다.
비록 안동김문이 다른 권문세가들과의 경쟁과 공격을 누르고 60년간 국정을 지배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지만 세도정치는 오히려 이전 면면히 내려오던 청음이 말한 바의 팔백년 내려오던 청백의 전통 때문이었다.
이러한 청백의 정신은 보백당의 자손인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이나 창균(김기보) 후손인 구제(김계광) 의해서도 실현되었다.
구전은 임진왜란 때에는 창의를 하였으나 난이 끝나 공훈을 논할 공훈록에 오르는 것을 스스로 사양하였고

문과급제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대북파의 이이첨이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상소문을 것을 종용받자 분연히

거절하여 파직되었다.
구제는 청백의 전형인 청빈한 선비의 일생을 살았다.
자신 문과급제를 하였고 농암 이현보의 문집간행을 맡았으며 서원 건립의 소두가 되는 문장과 학식에서

지역 유림의 존경과 명망을 누렸다.
문과급제 성균관 직강을 거쳐 풍기 군수를 지냈으나 청렴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남은 것은 초가 뿐이었고 집안에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서 그를 추모하러 왔던 선비들을

숙연하게 하였다. 그의 어린 딸은 친구인 고산 이유장이 거두어 며느리를 삼았다.
청음이청백전가팔백년 읊은 200년이 지나면서도 청백의 정신은 이렇게 면면히 이어 실천되어 왔다.
그리고 전통은 구한말에 고균(김옥균), 백야(김좌진), 지산(김복한), 오천(김석진), 동농(김가진), 하구(김시현) 등을 거쳐서

비극적인 모습으로 다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들은 세상이 변함에 약간만 타협을 했으면 명예와 관작과 권력과 부를 향유할 있었고 자식들 역시 출세를 누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택하였다.
백야는 노비문서를 태우고 노비를 해방 시키고 재산을 팔아서 학교를 세웠고 만주벌판에서 독립투쟁에 몸을 바쳤다.
오천 역시 일본이 회유책으로 남작 작위를 수여하자 거절하고 자리에서 자결을 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영남의 파리장서를 퇴계의 후손인 이만손이 우두머리가 되어 했는데 기호의 파리장서는 수북공(김광현) 자손인 지산이

소두가 되어 이루어졌다. 물론 지산은 차례나 감옥에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고 이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동농은 구한말 관료 최고위급 인사로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전세계에 일제에 의한 조선침탈의

불법성을 알리었다. 그는 상해에서 죽었고 이국 땅에 묻혔다.
삼당의 후손인 하구 역시 의열단에 가입하여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고 광복 후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일생을 북애공

주손으로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거칠고 힘든 정의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정정당당하고 의로운 일로써 생명을 삼는 철학과 도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동김씨가 삼한 갑족으로서의 명예를 누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청백의 전통을 면면히 지켜왔고 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역할을 담당한 선조를 배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백은 무엇인가?

그것은 각자가 자리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철학적 자세를 말한다.
관직에 있건 기업을 하건 학문을 하건 각자 정정당당하게 의롭고 올곧은 자세와 철학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청백이다.
의롭지 못하게 올곧지 않은 생각과 방법으로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유혹을 물리치는 정신과 자세가 청백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신의 생업에 의로써 생각하고 의로써 도모하면 그는 청백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사회적 도덕과 개인의 윤리가 지극히 혼탁해진 세상에 청백을 실천하라는 말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위로는 조상과 아래로는 자손 만대에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률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현실타산적인 오늘날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환언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백은 오늘날 더욱 빛나고 값진 것이며 또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잊어서는 되는 점이 하나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짐작하듯이 청백의 정신은 인물이나 그의 자손에게만 전유되는 것이 아니다.
보백당에서 그의 종손자 삼당공과 진사공, 보백당의 증손 구전, 삼당공의 종증손 문정공, 봉화의 구전에서 소산의 구제로,

문정공에서 형인 문충공의 자손 수북공을 거쳐 고균, 백야, 지산, 오천, 동농, 하구 등으로 이어지듯이 청백의 전통은

우리 김문의 모든 성원들 사이에 공유되고 실천되어 왔다.
따라서 자기의 분파적 단위를 넘어서 시조 태사공의 이름 아래 모든 자손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을 거두어들이고 조상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함께 나누고 전하는 노력이 각별한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선원과 청음은 몸은 서울에 살았지만 고향 안동에 대한 각별한 정을 잊지 않았다.
선원은 병자호란 순국하였으므로 뒤에 안동을 없었으나 생전에 안동을 찾았고 족인 뿐만 아니라

안동의 타문중과도 돈독한 관계를 지녔다. 그는 전서(篆書) 뛰어나서 학봉(김성일) 묘비도 주었다.
청음은 자주 안동에 내려왔고 조상을 기렸으며 청원루와 서미동 서간사 등으로 족적을 남겼다.
삼연, 풍고, 문간공(김학순), 동농 등을 비롯하여 청음과 선원의 자손은 때때로 안동을 찾아와 뿌리에 대한 각별한 정과 회포를 읊고 안동의 족인들을 살폈다.

그러므로 서로를 찾아서 조상의 공덕을 함께 나누고 전하는 마음과 실천 행동이 필요하다.
삼연은 문곡이 준비했던 기해보 족보를 60년이 지난 기해년에 처음으로 간행하면서

서문에萬身而一心 千里而一室 且將千年如一日”( 만신이일심 천리이일실 차장천년여일일) 이라는 말씀을 남겼다.
말은淸白傳家八百年”( 청백전가팔백년) 이란 말과 더불어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잠언이다.
이제 우리는 훌륭한 조상을 자랑하지만 자랑에만 그칠 것이 아니다.
과연 조상이 남긴 높은 도덕과 가치를 배우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일이다.
가문의 흥망은 훌륭한 조상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훌륭함을 현창하고 실천하는 자손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흔히 금관자 서말 옥관자 서말이라 하여 안동김문이 조선조에 관료와 학자를 많이 배출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데 부귀영화란 여름 한철 푸르게 빛나다가 가을이 되면 한갓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에 불과한 것이다. 남는 것은 정신이다.
정신이 면면히 후손의 머리와 가슴 속에 흘러 전해질 비로소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작은 분파의 틀을 넘어서 시조의 동일한 자손으로서 하나가 되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 됨의 문화적 핵심인 청백의 전통을 오늘날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실천하도록 애를 쓰고 있는가를 성찰적으로 다짐해야 한다

예기(禮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善待問者如撞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

<선대문자여당종 고지이소자칙소명 고지이대자칙대명> (제대로 도를 구한다는 것은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종을 작게 때리면 종소리는 작게 울릴 것이요 크게 때리면 종소리는 크게 울릴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안목으로 조상의 흔적을 찾고 훌륭한 문화전통을 서로 나누어 살리고 또한 후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안동김문의 명예로운 중흥을 기대하면서 짧은 이야기를 마친다.

 

김광억 (서울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장

편집자 : 글은 2011 4 30 서울 수운회관에서 개최되었던 안동김씨 대종중 년차 총회에서 행한

기념강연의 내용이다.


----------- 목      차 --------  

(1) 안동김씨  

(2) 문헌록  

(3) 씨족사 

(4) 안동김씨세보 

(5) 본관지 연혁 

(6) 오김의종통 

(7) 세계원류분파도 

(8) 先,後,안동김씨 

(9) 벌열 

(10) 조선조 급제자 정록 

(11) 등과,인명 

(12) 文化財및寶物 

(13) 서원향사(書院享祠) 

(14) 종묘배향 

(15) 선조문집 

(16) 유적 

(17)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18) 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