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역사안동김씨 역사(先,後,안동김씨)
안동김씨 역사(先,後,안동김씨)

()安東金氏와 後()安東金氏

1. 新羅金氏와 先()安東金氏

   新羅金氏의 鼻祖인 大輔公 諱閼智는 西紀60(新羅 脫解王 4) 84日 서라벌(金城)

   서쪽 鷄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金櫃에서 태어났다.

   脫解王은 이는 ‘하늘이 준 아들’이라 하여 姓氏를 金氏로 賜姓하였다.

   당시 ‘遏止’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파사에게 양위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6대손인 ‘미추(味鄒)’가 왕위(新羅 第13 A.D.262~284)에 올랐다.

   (三國遺事)

   閼智 後 系統은 閼智→勢漢→阿道→首留→郁甫→仇道→末仇→奈勿王(17)→卜好 →習寶→

   智證王(22)→眞宗→欽運→摩次→法宣→義寬→魏文→孝讓→元聖王(17)→禮英→均貞→

   神武王(45)→文聖王(46)→安→敏恭→實虹→孝宗→敬順王(56)→殷說→

   叔承(先安東金氏始祖).()安東金氏의 始祖는 工部侍郞 平章事¹金叔承

   (?~1011 고려 제7대 顯宗3)이다.

   그는 新羅 第56代 敬順王의 9명의 아들

   (, , 鳴鐘, 殷說, , , , , 德摯로 鳴鐘, 殷 說, , , , , 德摯 7형제는

   樂浪公主의 아들이다.) 중 넷째 殷說(은열)의 아들이다.

   叔承(先安東金氏始祖) 6代 系統은 叔承→日兢→利請→義和→敏成→孝恭

   →孝印→忠烈公 方慶(先安東金氏中始祖)

   →之慶

   →玄慶

   →孝구

   →孝綬

   →孝組

   中始祖 忠烈公 方慶(1212康宗元年~1300 忠烈王26)은 安東에서 出生 高麗朝에서 三別抄를 平定한 후,

   2차에 걸친 倭賊 征伐의 功勞로 都元帥가 되고

   推忠靖難定遠 功臣 壁上三韓匡靖大夫 三重大匡 參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致仕한 후

   加資되 어 僉議令에 이르러 上洛君 開國公에 封해지고 安東지방에 食邑 1千戶 食實封 3百 戶를

   下賜받았다.

   歿後 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에 追贈되고 諡號 忠烈을 받다.

   父 孝印은 兵部尙書 翰林學士이다.

   先安東金氏는 上洛金氏로도 불린다.

 

(得姓祖以來 世居地는 풍산읍회곡리이다) ()安東金氏 名字講定(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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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通

派別

군사공파

 

 

 

 

도평의공파

 

 

 

 

 

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서운관정공파

 

 

 

 

()安東金氏

 

 

※註

1.  평장사(平章事)=고려시대의 정2품 관직.

    982(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 내사시 랑(內史侍郞)평장사 ·

    문하시랑(門下侍郞)평장사를 두었고 모두 정2품관이었으며 정원은 각각 1명씩이었다.

    叔承(?~1011)은 성종조에 관직에 임한 것으로 추정됨

 2. 江陵金氏(始祖는 新羅 29代 武烈王 5代孫 周元),

光山金氏(始祖는 45代 神武王의 3子 興光),

    永山(永同)金氏(始祖는 神武王 後孫 令貽),

善山(一善)金氏(始祖는 46대 文聖王의 8世孫宣弓)

    唐岳金氏(始祖는 文聖王 5世孫 樂)을 除外한 大部分은 敬順王 後孫이 다.

                                                       [()安東金氏大宗會 홈페이지 참고]

3. ()安東金氏

    始祖 諱 宣平

    唐昭宗 天復元年辛酉(서기901)에 新羅 제52대 孝恭王(재위897~912)朝 興德宮에서 나시니

    鳳眼   鬚와 星精虎威이다.

    景哀王 3(926) 춘추 26세에 古昌郡 城主로 나가시어 36세에 軍兵을 크게 일으키고

    高麗太祖를 도와 甄萱을 甁山에서 大破하 다.〔즉 後晋 高祖 天福元年丙申(서기936)이다〕

    뒤에 麗朝가 豊山 一直 內城 등 三縣을 合하고 昇格하여 安東大都護府로 하고 그 훈공으로

    관직을 超遷하여 위가 三韓壁上功臣輔國大匡(삼한벽상공신보국대광)

    光祿大夫 太師亞父(광록대부 태사아보)에 이르고安東은 本來 新羅의 古(고타야)郡인데

    景德王 이 古昌郡으로 고치고 高麗 太祖가 後百濟王 甄萱과 郡地에서 싸우나 敗함에

    郡人 金宣平 權幸 張吉이 太祖를 도와 功이 있음으로 宣平은 大匡을 拜하고 幸과 吉은 大相을

    拜하였으 며 이로 말미암아 郡을 府로 昇格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다.

    (甲子譜 首編 61p 參照) 邑 人이 그 德을 思慕하여 祠廟(現 太師廟)를 세우고 享祀하다.

    卒年은 未詳하고 府西 台 庄리 子坐에 奉葬하다.

    二子를 낳으니 長은 璣요 次는 玹이니 寶文閣學士 太學署丞 (보문각학사 태학서승)이다.

                                             (甲子譜 首編 108p, 201p 參照)(안동김씨연원록 1p 참조)

 

※大匡: 高麗初 文武官階의 하나. 九品鄕職의 第2等級(2品上) 大相: 九品鄕職의 第4等級(4品上)

※當時 우리 始祖께서는 古昌城主셨고,

   東權氏의 始祖 權幸은 新羅王室의 後裔로서 本名이 金幸이며 古昌城의 刑官이었고,

   安東張氏의 始祖 張吉(貞弼: 父는 中國 大司馬將軍 諱源)은 嶺南 蘆田에서 弟 子들에게 學問을

   講論하시다가 함께 倡義하시어 그 勳功으로 古昌君에 封해지고,

   各 高麗太祖로부터 安東權, 安東張氏로 賜姓을 받았다.

※亞父: 아부(=아비부, 늙으신네부, 할아범부, 남자미칭보=尊親焉, 孔子稱尼-范增稱亞-皆倣此)

 

4. 이 증거들은

()安東金氏 始祖 金 諱宣平(901~ ?) 께서는 36세때인 서기936년에 古昌城主 로서 高麗 建國을

    위한  大功(대공)을 세워 古昌(고창)이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로 昇格(승격)함과 동시에

    三韓 壁上功臣 輔國大匡(삼한벽상공신 보국대광) 光祿大夫 太師亞父(광록대부 태사아부)에 이르렀고

    그때부터 本貫(본관)을 安東으로 쓰게 된 것이다.

    권·장태사는 이때 본관을 安東(안동)으로 賜姓(사성)받은 점이 이를 입증한다 할 것이다.

()安東金氏의 始祖 金叔承(?~1011 고려 제7대 顯宗3) 金宣平 보다 約 6 王朝 後의 사람인데,

    그 세거지가 풍산읍회곡리이고, ()安東金氏 最初 族譜 (大同譜)가 庚辰譜(1580 선조13)로써,

()安東金氏의 最初 族譜 己亥譜(1719 肅宗45) 140년 뒤에 출간된 점 등을 살펴보면,

    ()安東, ()安東으로 구별 호칭케 된 근원은 최초족보(大同譜)  간행순에 의한 것으로추정됨.                          

 

2010, 10, 10. 安東金氏漁潭公派宗會長 杜 漢 編

 

안동김씨[]

[安東金氏[] ]

정의

 

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김삼근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김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태사가 된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받들며

관향 안동에서 일천여 년을 세거해 온 안동의 토성이다.

이들은 같은 본관의 김방경계(金方慶系)와 구분하여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로 불린다.

 

연원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의 성주로서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으로

고려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보(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고

고창군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거하였다.

 

입향경위

 

김선평의 9세손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 풍산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부근)

살다가 소산리으로 옮겨 정착한 이래 크게 번성하였다.

김삼근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김계권(金係權)은 한성판관이고,

작은아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지냈다.

김계권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세조의 국사를 지낸 명승 학조대사(學組大師)이고

둘째 김영전(金永詮, 1439~1523)은 사헌부감찰,

셋째 김영균(金永勻)은 진사,

넷째 김영추(金永錘)는 수원부사,

다섯째 김영수(金永銖, 1446~1502)는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장령 김영수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 삼당(三塘) 김영(金瑛, 1475~1528) 1506년 문과에 올라 이조참의가 되었고,

둘째 김번(, 1479~1544) 1513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서윤이 되었다.

셋째 김순(金珣)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형조좌랑을 지냈다.

김영의 손자 창균(蒼筠) 김기보(金箕報)는 현감을 지냈고,

현손 구재(九齋) 김계광(金啓光, 1621~1675)도 문과에 올라 풍기군수를 지냈다.

11세손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은 문과를 거쳐 병조좌랑을 지냈고,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독림운동가 학우(鶴右) 김시현(金始顯, 1883~1966)도 김영의 후손이다.

김영수의 둘째 아들 김번을 파조로 하는 장동파(
壯洞派)는 인조 때의 명신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순조, 헌종, 철종 대에는 왕실의 외척으로 정권을 잡아

3명의 왕비와 15명의 정승, 6조판서와 대제학 등 많은 명신을 배출하며 조선 제일의 세도가가 되어

‘장동김씨’ 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한편 김삼근의 작은아들 김계행은 무오사화 뒤 낙향하여 만년에 길안면 묵계리에 만휴정(
晩休亭)을 지어

휴식처로 삼은 이래로 후손들이 묵계에 정착하였다.

김계행의

맏아들 김극인(金克仁)은 영릉참봉,

둘째   김극의(金克義),

셋째   김극례(金克禮)는 생원,

넷째   김극지(金克智)는 요절 하였고,

다섯째 김극신(金克信)은 무과에 급제하여 문천군수가 되었다.

셋째 아들 김극례는 봉화로 이거하였는데 그의 손자 정준(廷準)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가 되고,

현손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 1567~1629)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김중청의 아들 역면(易眠) 김주우(金柱宇) 162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다.

현황

안동김씨[]은 현재 풍산읍 소산리, 길안면 묵계리, 풍산읍 소리, 남선면 구미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

풍산읍 소산리에 비안공 구택(比安公舊宅) 돈소당(敦素堂),

김영수가 노모를 위해 지은 삼구정(三龜亭),

청음 김상헌의 청원루(淸遠樓),

김영수의 종택 양소당(養素堂),

동야 김양근 구택 등이 있다.

또 풍산읍 현애리에 독립운동가 김시현의 생가가 있으며,

풍산읍 서미리에는 김상헌의 위판을 봉안했던 서간사(西磵祠)와 김상헌 유허비가 있다.

또 길안면 묵계리에 김계행을 제향한 묵계서원(溪書院), 안동김씨 묵계 종택, 만휴정 등이 있다.

참고문헌

송지향, 『안동향토지』(대성문화사, 1983)

서주석, 『안동문화산책』(이화문화출판사, 2001)

 

 

**()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의 구분

1. 현황

. 각종 보학(譜學)에 관한 문헌(文獻)에서 구분

1979.4.1
일신각에서 발행한 '한국인의 족보'에 보면,

"안동김씨는 본관(本貫)이 같으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2계통이 있으므로

신안동(新安東), 구안동(舊安東)으로 구별한다."고 하면서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를 '()안동김씨',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를 '()안동김씨'로 구분하였다.

다른 문헌도 이와 유사하다.

. (
)안동김씨인 '안동김씨대종회(安東金氏大宗會)'공식 홈페이지 기록사항

"
안동김씨라 하면 일찍이 고려조 부터 우리 안동김씨만을 일컬어왔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후안동김씨(後安東金氏. 일명 新安東金氏))가 생겨나 혼동이 생겼다.

일반적으로 안동김씨라 함은 우리만을 일컫는 것이 원칙이나,

두 안동김씨를 구분해야 할 경우에는

우리를 ('()안동김씨', 또는 구()안동김씨)라고 부른다."

"
옛날,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안동의 다른 명칭을 살려 상락김씨,화산김씨,영가김씨,고창김씨,복창김씨

또는 선안동김씨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
종전에는 우리 성씨(
姓氏) '()안동', 또는 '()안동'으로 혼용해 왔으나,

본 홈페이지에서는 2001.11.11부터 선안동(先安東)이란 명칭을 가능하면 주로 사용하기로 함."

. (
)안동김씨인 '안동김씨대종중(安東金氏大宗中)' 공식 홈페이지 기록사항

특별히 기록하지 않았다.

2.
역사(
歷史)적 사실비교

. ()안동김씨의 시조 김숙승(金叔承)

(1)
경순왕(敬順王. ?-978)
신라(新羅)56 992년만인 경순왕 재임(927-935 )때 고려 왕건(王建)에게 항복하였고,
후일 왕건(
王建)의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혼인하여 정승(政丞)이 되었음.
경순왕은 슬하에 9명의 아들 중 7명이 낙랑공주가 낳았다. 그중 넷째 아들이 은열(
殷說)이다.

(2)
김은열(
金殷說. 937- ?)
김은열은 김숙승(金叔承)을 낳았다.

(3)
김숙승(
金叔承. ?-1011)

안동김씨대종회 홈페이지 '평장사(平章事)공 기록 각종 자료에 보면,

숙승(叔承) (, 淑承, 叔興)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연표 김숙흥(
金叔興)란에, 1011년 거란이 침입해 오자 구주(龜州)에서 거란군 1만여명을

격멸시켰으며, 그해 거란 성종이 이끄는 대군에게 중과부적으로 순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011년은 고려 8대 현종(
顯宗) 2년이다.
또 다른 문헌에는 출생년도가 955년이라고 하였다.

(4)
김이청(
金利請. 생졸년미상)
시조 김숙승의 손자. 고려 때 안동태수(
安東太守)를 역임. 상락군(上洛君)에 봉함.

. (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901-?)

(1)
출생

부존의일칙(
附存疑一則) 일계고적등기후식(佚系古蹟謄記後識)에 의하면

당소종천복원년신유(唐昭宗天復元年辛酉)에 흥덕궁(興德宮)에서 출생하셨다.
신라 효공왕(
孝恭王) 5(서기 901), 후백제 견훤 10년에 출생하셨다.

(2)
사성(
賜姓)과 본관(本寬) 하사

26
세 때 고창성주(
古昌城州 : 安東)로서 930(신라 경순왕 4. 후백제 견훤 39. 고려 태조 13)

1월 고창전투에서 고려 왕건을 도와 후백제의 견훤을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26
, 또는 36세 때에 고창성주였다는 문헌이 있으나,

만약 36세 때라면 당소종천복원년신유년과 신라 효공왕(孝公王) 5년이 901년이기에 930년 고창전투 때는

성주(城州)께서 36세가 안됨. 따라서 36세 때 성주였다는 문헌은 수정하여야 함.)

그리고 이 때 고창군을 안동도호부로 승격시키고,

3공신 중 권행(權幸)은 안동권씨로 사성(賜姓)하고,

김선평(金宣平)과 장길(張吉)은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936(후백제 신검1, 고려 태조 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3.
결론(
結論)

. ()안동김씨

(1)
관향(
貫鄕)
()안동김씨 시조 김숙승(金叔承.955?-1011)의 손자 김이청(金利請)

'세재명덕수적안동자공시(世載名德受籍安東自公始)라는 여지승람 본부 인물기의 기록을 근거로

"안동김씨로 적을 받은 것이 공()으로 부터이며,

상락(上洛)으로 불리게 된 것도 김이청(金利請)으로 부터이다."라는 것을

()안동김씨 최초 족보인 경진보(庚辰譜.1580.조선 선조13)

안동김씨성보(安東金氏姓譜) 발행으로 부터 안동(安東)김씨 관향을 사용하였다고 추정됨.

. (
)안동김씨

신안동김씨 시조 김선평(
金宣平) 930년에 시조로 본관을 하사받았다.
, 시조 김선평은 '안동김씨'라는 본관(
本貫)을 구()안동김씨보다 먼저 하사받았다.

. 향후 정립(
定立)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그냥 안동김씨이다.
다만, 각종 문헌상엔 이미 구(
), ()안동김씨로 구분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김방경(
金方慶) 후손들은 '()안동김씨'로 통일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각종 문헌이나 다른 성씨에서 오김(
吾金)을 일러 '()안동김씨'로 부르고 있으나,

그러나 오김(吾金) '안동김씨 태사공(太師公) 휘 선평(宣平)의 후예'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다시말해서 오김(吾金)은 오직 '안동김씨'일 뿐이다.


----------- 목      차 --------  

(1) 안동김씨  

(2) 문헌록  

(3) 씨족사 

(4) 안동김씨세보 

(5) 본관지 연혁 

(6) 오김의종통 

(7) 세계원류분파도 

(8) 先,後,안동김씨 

(9) 벌열 

(10) 조선조 급제자 정록 

(11) 등과,인명 

(12) 文化財및寶物 

(13) 서원향사(書院享祠) 

(14) 종묘배향 

(15) 선조문집 

(16) 유적 

(17) 안동김씨와 청백의 전통 

(18) 安東金氏家門의成長과繁榮